24. 10. 23 빈필하모닉 내한공연 리뷰
빈 필하모닉과 넬손스의 만남
빈 필하모닉은 상임 지휘자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지휘자를 취사선택한다. 최근 중요한 페스티벌과 해외 투어에서 가장 이들과 많이 호흡을 맞추는 지휘자는 안드리스 넬손스이다. 마리스 얀손스의 뒤를 잇는 라트비아 출신의 지휘자로서, 원로 지휘자들을 제외하면 크리스티안 틸레만과 더불어 단연 최고의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현재 넬손스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다. 두 악단 모두 재계약을 하면서 지휘자에게 두터운 신뢰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넬손스는 현재 전 세계에서 단 두 군데에서만 객원지휘를 하고 있다. 바로 세계 최고라 일컬어지는 빈 필하모닉과 베를린 필하모닉이다. 두 악단과는 매년 중요한 공연에서 아주 무거운 레퍼토리를 내놓고 있다.
특히 넬손스는 2010년부터 빈 필하모닉과 함께 연주를 해왔고, 2020년에는 신년음악회를 지휘했으며, 이후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빈과 잘츠부르크 등지에서 말러 교향곡 전곡을 함께 연주하고 있다. 빈 필하모닉과 넬손스의 음악적 연대는 개인적인 친분을 넘어선 것이다. 그들은 서로 어떤 음악적 교류와 영향을 주고받고 있을까? 이번 내한 공연에서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을까?
미도리의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에 대해선 그저 존경심이 들뿐이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불리며 수많은 연주와 대중의 관심 속에서 성장해 왔다. 결국 정신적인 문제도 겪었고, 신체적으로도 부상을 입으면서 공백기를 가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신동이 이제는 원숙한 표현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음악을 다시 펼쳐나가고 있다.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1번 연주에서 협연자의 음량이 다소 아쉽게 느껴졌다. 그녀의 유니크한 음색과 고풍스러운 음악이 공연장 전체에 효과적으로 퍼져나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가까운 좌석에서는 충분히 즐길 수 있었지만 3층의 관객들도 같은 음향을 느꼈을지는 의문이다. 빈 필하모닉과 넬손스는 음량을 억제하면서 협연자를 최대한 서포트했다. 일부 단원들이 집중력을 잃은 듯한 순간도 있었지만, 세 악장의 도입부와 마지막 부분에서는 모두가 특별한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앙코르로 들려준 바흐의 파르티타 3번 1악장에서는 다행히 그녀의 음색이 온전하게 전달되었다. 빠른 움직임 속에서도 깊이 있는 울림이 느껴졌다. 쉼표하나 없는 패시지를 거침없이, 그렇지만 모든 음을 세심하게 다루었다. 양쪽으로 펼쳐져있는 1, 2 바이올린 단원들의 모습에서도 앙코르가 끝난 후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에 대한 존경이 많이 느껴졌다. 연주가 끝나고 출연자 입구 쪽에서 미도리 연주자를 마주쳐 연주 잘 들었다고 인사를 건넸다.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해주었다.
말러 5번
“말러 교향곡은 햇살처럼 밝은 순간부터 암울한 절망까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스펙트럼을 표현하죠. 말러를 연주할 때는 음악에 온전히 맡기고, 모든 걸 걸어야 해요.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는 풍자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드라마를 담은 작품이죠. 두 곡 모두 쉽지 않은 작품이지만 빈 필하모닉의 DNA에 깊이 각인돼 있어요. 이들과 함께라면 자신 있습니다.” 이번 내한 공연을 앞두고 지휘자 넬손스가 꺼낸 말이다.
넬손스는 정말 모든 걸 걸어버린다. 리스크 테이킹이라는 것을 끝까지 해버린다. 빈 필하모닉은 그렇지 않아도 높게 설정하는 음정, 자신들의 음향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불편한 옛날 방식의 악기들, 살인적인 연주일정으로 인한 노동강도로 매일 높은 수준의 압박감에 시달리는 악단이다. 게다가 빈 현지에서 4일 연속으로 공연을 한 후, 한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넘어와 23일이 아시아 투어 첫 공연이었다. 앞으로 한국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에서 해야 할 공연이 약 20개이다.
그런데 넬손스는 대충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또는 안전하고 깔끔하게만은 할 수 없는 지휘자일지도 모른다. 악상과 표현의 폭은 수직적, 수평적으로 최대치를 요구했다. 템포 측면에서는 1, 2악장도 마찬가지였지만 4악장은 내가 들어본 모든 말러 교향곡 5번 중에 가장 느렸다. 게다가 말러가 숨겨놓은 작은 조각들까지 넬손스는 모두 관객들에게 꺼내보였다. 이렇게 해석을 하면 연주의 난이도는 당연하게도 극적으로 상승한다. 금관악기 주자들의 미스가 나왔고, 팀파니가 악보보다 빠르게 나오는 실수를 하기도 했고, 현악기 주자들은 활 조절이 제각각인 부분들이 더러 있었다. 음반과 같은 완벽함을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웠겠지만, 나는 그 점이 좋았다.
각 파트의 음색부터 말하고 싶다. 모든 현파트 각각의 소리가 하나가 되어 또렷하게 전달되었다. 지휘를 하지 않아도 서로 들으면서 유연하게 타이밍을 맞춰갔다. 관악기들 역시 오보에, 호른은 다소 아쉬웠으나, 모든 파트가 다른 데서 들을 수 없는 고유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들이 각자의 분야의 최고의 연주자들이라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말러의 음악은 통일된 부분도 있지만, 각 파트가 뚜렷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 곡은 때때로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큰 음악을 이룬다. 이날 연주에서 각 파트의 이야기는 거칠고 선명하게 살아났다.
연주하는 과정에서 몇몇 마법 같은 순간들이 펼쳐졌다. 1악장과 2악장에서 보여준 실내악적인 사운드는 여러 악기가 섞여 어우러져 낯설지만 경이로웠다. 3악장에서는 합을 맞추기보다는 각자의 표현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었고, 그 과정에서 호른과 현악기의 앙상블이 자주 흐트러진 것은 아쉬웠다. 4악장은 위험할 만큼 느렸다. 그러나 지휘자와 단원들은 그 살얼음판을 기꺼이 건너갔다. 그 결과로 아주 멋진 질감과 잊지 못할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불협화음이 협화음으로 바뀌며 점점 작아지는 마무리는 압권이었다. 5악장은 교향곡 전체를 승리와 기쁨으로 이끄는 절정 부분인데, 넬손스는 빈 필의 사운드와 리듬을 적극 활용하여 이 감정적 절정을 극대화시켰다. 특히 마지막 클라이맥스는 탁월하게 표현되며 큰 감동을 주었다.
빈 필하모닉과 넬손스가 가는 길
나는 최소한 두 악단, 빈 필하모닉이나 베를린 필하모닉 연주에서 음반과 같은 깔끔함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악단이라면 유럽에 좋은 악단들이 즐비하다. 두 악단에서 만큼은 새로운 것, 파격적인 것, 무언가 플러스알파를 듣고 싶다. 그런 측면에서 23일 이들이 보여준 연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분명 특별했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다.
지휘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1시간이 넘는 스코어를 완벽하게 외워서 안전하게 지휘하는 지휘자는 이 시대에 많다. 반면, 넬손스라는 지휘자는 음악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위험을 감수하는 지휘자이다. 안전한 길보다는 처음 가보는 길을 택해 단원들과 그 여정을 함께 즐긴다. 이런 해석과 시도, 그리고 특유의 에너지를 빈 필하모닉 단원들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불만을 가진 이들도 있을 것이고, 낙오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그 길이 잘못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말러, 번스타인, 카라얀 등 역사상 최고의 지휘자들이 거쳐간 세계 최고의 악단은 몇몇 소수의 지휘자들과 전통을 지키면서도 매일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아직 젊은 지휘자 넬손스 역시 자신의 선배 지휘자들이 당대에 그랬듯이 매 연주 해석에 대한 호불호를 만들어내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들이 앞으로 함께 이루어낼 많은 것들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