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주영 Apr 11. 2022

6. 길을 잃어도 무섭지 않았다.

사랑은 최선을 다하는 것

깜깜한 밤이 돼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방문을 여는 순간 우리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침대 대각선으로 변기가 떡하니 보였다. 방 안에 화장실이 있는 게 아니라 화장실 안에 침대가 있는 것이었다. 황당한 상황에 처음엔 당황스러워 놀랍기만 했다. 딱 삼 분 후 현타가 왔다. 그러니까 둘 중 한 명이 볼일을 보게 되면 나머지 한 명은 오밤중에 자다가도 방에서 나가야 한다는 현실을 깨닫자 절망스러웠다.

나는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에두아르는 즉각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배가 너무 아프다며 자리를 피해달라고 했다. 그가 방에서 볼일을 보는 동안 공동욕실에서 샤워를 하기로 했다. 세면도구를 챙겨 가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전날 산장에서 얼음물에 감전된 충격으로 세면도구 파우치를 세면대에 놓고 온 것이었다. 치약도 샴푸도 린스도 보디워시도 심지어 비누 조각 하나도 없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넋을 놓고 있는데 에두아르가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갈아입을 옷과 수건만 챙겨 들고 공동욕실로 향했다. 욕실 불을 켰다. 순간 정육점에 잘못 들어간 줄 알았다. 괴기스러운 붉은색 전구 때문이었다. 샤워기 물을 틀자 순간 세차장에 온 줄 알았다. 물살이 어찌나 센지 샤워기를 어디 한 곳에 일 초 이상 대고 있으면 근육이나 내장 파열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인간은 극한 상황에 부딪히면 오히려 긍정적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강력 파워 물살을 현란한 동작으로 온몸에 뿌리는데 순간 기적처럼 내 눈에 비누가 들어왔다. 욕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비누 조각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 비누가 세안용인지 세탁용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냉큼 비누를 주웠다. 나는 기적의 비누를 온몸에 문지른 후 제트스파 같은 물살로 헹궈냈다. 정말 개운했다.

사람은 개고생을 해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까다롭지 않으면 사는 게 수월해진다. 그날 이후 비누만 보면 산다. 비누 수집이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긴 것이다. 비누를 보면 묘하게 든든해진다. 비누를 볼 때마다 뭐랄까 자신감 같은 것을 느낀다. ‘이것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정서적 든든함이 자신감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누 하나도 이렇게 든든함을 주는데, 사람이 주는 정서적 든든함은 어떨까. 사랑받는 사람들이 자신감으로 넘쳐나는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서른 중반에 모아둔 돈을 싸 들고 이탈리아로 떠날 수 있었던 누가 봐도 대책 없는 행동은 어쩌면 자신감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운 좋게도 좋은 부모를 만났다. 엄마와 아빠가 우리 삼남매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것을 입혔다는 게 아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명성이나 학식이 있어 자랑스러웠던 것도 아니다. 엄마와 아빠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우리 삼남매를 사랑했다. 가장 강한 사랑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무게감이 있어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은 흔들려도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 나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절대 쓰러지지 않아.


에두아르에게 부모는 그다지 든든한 존재가 아닌 것 같다. 그런데도 에두아르는 나보다 더 자신감으로 넘쳐난다.

에두아르는 여행을 통해서 온갖 모험을 하며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닐까. 부모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랑을 받았던 나의 자신감이 수동적인 자신감이라면 에두아르의 자신감은 혼자 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든든함으로 가지게 된 능동적 자신감일 것이다.

이튿 날. 예약해둔 샴브르 도트를 향해 출발했다. 차창 밖으로 마시프상트랄의 드넓은 평야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산세가 끝없이 지나갔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풍경이었다.

양옆으로 평온한 평야가 펼쳐지고 눈앞으로는 지평선 너머 하늘이 있는 풍경 속을 달렸다. 큰 주차장을 발견했다. 그곳에 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자연공원은 조금 가파른 숲길로 시작되었다. 천천히 걷다가 에두아르가 갑자기 ‘앗차’ 했다. 차 안에 지도를 놔두고 왔다며 가서 가지고 와야겠다고 했다. 지도가 없으면 없는 대로 걷자고 하자 에두아르는 펄펄 뛰었다.

“야! 너 예전에 브리앙송에서 길을 잃어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내가 얼른 가서 가지고 올 테니까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삼십 분쯤 혼자 기다렸다. 에두아르가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다. 천천히 걷는 사이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우리는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한참 걸었는데도 이상하게 주차장이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잃은 것 같았다. 방향 감각 하나는 탁월한 에두아르는 본인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지도를 땅에 펼쳐놓고 열심히 들여다보며 “말도 안 돼”를 연발했다. 그러는 사이 사방이 칠흑처럼 깜깜해졌다.


다행히 달이 밝은 밤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쏟아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늘에서 별이 빼곡하게 빤짝이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밤하늘은 본 적이 없었다. 옆에서 에두아르는 길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어떡하다 길을 잃었지? 말도 안 돼! 주영, 우리 오늘 여기서 밤새워야 할지도 모르니까 마음의 각오 단단히 하고 있어. 길을 잃더라도 밤새도록 걸어야 해. 잘못하면 늑대한테 잡아먹힐 수도 있어.”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지고 내 옆에는 에두아르가 있었다.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한국의 빌 브라이슨' 이주영이
'프랑스 책벌레' 라틴어 선생과 함께 한 10년간의 여행,
여행 과로사 직전에 외친 '여행선언문'


매거진의 이전글 5. 수백년 된 문화재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