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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영 Apr 20. 2020

3. 나는 지구 최강 오지라퍼와 산다

여행자를 위해 지하철에서 연설하고, 친구를 위해 친구 딸과 싸우는 남자

"주이 고기룰 머고요(중이 고기를 먹어요).”


남편이 한국어 교재에 나와 있는 예문을 소리 내어 읽고 있다. 며칠 전에 있었던 사건 이후 남편이 한국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매주 목요일, 남편은 그리스어 회화반 수업을 들으러 퇴근 후 바로 학원으로 간다. 학원으로 가는 지하철 안이었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노년층 단체 관광객이 지하철에 탔다. 평소 같으면 책을 읽느라 옆에 누가 있던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텐데 한국인 관광객이라 관심을 가지고 봤다. 그런데, 한 남자가 한국인들 옆에서 알짱거리더니 뭔가를 훔쳤다. 그 순간을 목격한 남편은 “소매치기다! 소매치기!”를 외치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 사이 지하철은 멈췄고 소매치기는 도망가 버렸다. 소매치기를 놓쳐 한국인들을 돕지 못한 남편은 너무 화가 나서 지하철 안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연설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지하철에 휴대폰을 놓고 내려도 다음날 분실물 보관소에서 찾을 수 있다는 걸 아는가? 프랑스에 얼마나 많은 도둑놈이 살고 있는지 아는가?” 


그때 듣고 있던 한 승객이 “그렇게 한국이 좋으면, 당신 한국 가서 살면 되겠네”라고 말했다. 이야기의 본질을 흐리는 비아냥을 듣고만 있을 남편이 아니다. 남편은 ‘수치를 느끼고 반성하는 태도, 문제제기와 해결을 통한 건전한 사회 건설’이라는 거국적인 테마로 주제를 바꾸어 다시 열변을 토했다. 


해야 한다면 지하철에서 타인에게 연설도 마다하지 않는 남자.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한국인들은 지하철에서 큰소리로 떠드는 남편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본인들이 소매치기당한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내려야 할 역이 다가오자 남편은 열변을 마무리하고, 한국인들에게 짧게라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한국어로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떠오르는 한국어라고는 나에게 가장 많이 들은 소리인 “시끄럽고”“그만!” “조~용”따위밖에 없었다. 

한국인들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이, 지하철은 정차했다. 급한 대로 한국말로 “감사합니다” 한마디를 남기고 내렸다.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오면서 남편은 뜬금없이 ‘감사합니다’라고 한 게 너무 창피했다. 한국인들이 자신을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뻔하다. 한국어로 ‘소매치기’라는 단어만 알았어도 이런 오해는 없었을 것이고 소매치기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싶었다. 한동안 손 놓고 있던 한국어를 다시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인새운 짤고 예수룬 길다아~(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저녁 식사 후 남편이 다시 한국어 교재를 꺼내 들었다. 진도가 빠르다. 어제는 분명 단문(單文)을 공부했는데, 오늘은 연결어미 ‘~고’가 등장하는 복문(複文)을 공부하고 있다. 나는 남편이 어젯밤 몇 시에 잠을 잤는지 모른다. 아침에 잠이 부족하다고 한 것을 얼핏 들은 것도 같다. 남편은 내일 아침에도 잠이 부족해 피곤할 것이다. 중년의 나이에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자는 시간을 아껴가면서 공부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영광을 보자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기에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공부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편은 출세가도를 달리며 대외적으로 성공한 위치에 오르고 싶어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지적 호기심을 채워나가는 것이 즐거울 뿐이다. 아무리 좋아서 하는 짓이라도 평생 그만큼 했으면 지겨울 만도 한데 50년이 넘도록 줄기차게 공부하고 독서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대체로 프랑스인들은 오지랖이 넓은 편이다. 이런 국민성이 뒷받침되어 있기도 하지만, 남편의 오지랖 수준은 일반 프랑스인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다. 오지랖이란 남의 일에 쓸데없이 발 벗고 나서 참견하고 상관하는 것이다. 어떤 일에 나서서 간섭하려면 그 일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오지랖은 학습을 동반해야 한다. 


친구 필립이 그의 딸 아엘리아가 키우는 토끼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다고 하소연한 적이 있었다. 집안에 토끼 똥이 널려있어 우울하다고 했다. 아엘리아는 여러 마리의 토끼 이외에도 영리한 개 1마리, 주워 온 고양이 1마리, 비만 햄스터 2마리, 흰색 공작비둘기 2마리, 무척 시끄러운 잉꼬새 3마리를 키우고 있다. 남편의 오랜 친구 필립은 아픈 아내를 요양소에 보낸 후부터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남편은 아엘리아에게 토끼를 다른 집에 입양 보낼 것을 권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아엘리아는 그 무시무시하다는 열네 살(중2)이다. 

남편은 당장 ‘토끼의 수명 및 토끼에게 배변 교육이 가능한지’를 비롯하여 집토끼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토끼의 아이큐는 보통 45 ~ 50 사이로 배변 교육이 가능하긴 하지만 쉽지 않다는 것과 의학의 발달로 토끼의 수명이 많이 연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해당 시청의 동물보호 관리시스템에 대해 알아보고 동물보호단체에 상담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호기심이 넘쳐나는 남편은 동물보호법을 덩달아 들여다보기도 했고, RSPCA(The Royal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Animals)라는 ‘영국 왕립 동물학대 방지 협회’의 존재와 ‘인간 동물학’에 대해 알게 되며 놀라워했다. 

남편은 아엘리아를 설득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되지 않겠냐고 했지만, 내 생각에는 몰라도 될 것 같았다.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 동물에 관한 지식을 갖추어도 남편은 아엘리아를 설득할 수 없었다. 필립의 우울증은 점점 더 심해져 갔다. 그런 친구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남편은 아엘리아를 설득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말짱 꽝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54살 남편은 14살 아엘리아와 대판 싸우고 현재 남편과 아엘리아는 원수 사이가 되었다. 결과야 어떻게 되었든 남편은 우울증에 걸린 친구를 토끼똥에서 구해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해야 했다. 남편이 끊임없이 공부할 수 있는 비결은 ‘뭣도 모르면 나댈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뭣도 모르면 나댈 수 없는 법.



에두아르는 어쩌다 태평양 오지랖의 소유자가 된 것일까?

나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온갖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포함한 전기문(傳記文)을 꾸준히 탐독하는 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전기문은 세상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열정적 태도로 앞장서서 바꿔나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전기문의 주인공들은 용기 있고 정의로우며 도전적이다. 온갖 어려움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해냈다. 한마디로 멋진 사람들이다. 

‘멋진’ 건 누구에게나 동경의 대상이 된다. 어릴 적 위인전기에 등장하는 위인이나 영웅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그들처럼 살고 싶다는 꿈은 누구나 한 번씩 꿔봤을 것이다. 얼마 전에도 남편은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의 전기문을 읽었다. 비소츠키는 구소련의 독재체제에 억압받는 인민을 대변해서 당을 비판했던 저항 가수다. 비소츠키의 전기를 읽는 내내 남편은 뭐랄까 들떠 있었다. 남편은 비소츠키가 되어 구소련의 대중들 앞에서 열창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어느 날은 미지와 불가능의 세계에 도전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했다는 알피니스트 보나티의 전기문을 읽고 있었는데 그때 남편은 보나티와 함께 몽블랑 어딘가를 등반하는 듯 전율했다. 쉰을 넘겨도 전기문을 탐독하는 에두아르는 ‘한 인간의 멋진 삶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남편을 만나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인데, 위인들은 모두 오지랖이 넓다. 잘못된 세상을 바꾸고, 누군가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이 모든 행위는 참견하거나 나대야만 가능하다. 다만, 우리가 위인이나 영웅들을 ‘오지랖이 넓다’고 인식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는 혁혁한 업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업적도, 실적도 없는 에두아르는 그저 공부하 오지랖쟁이일 뿐이다. 하지만, 오지랖이 넓다는 것은 언젠가는 위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일지 모른다.


지구 최강 오지라퍼가 사는 루브시엔



"사자가 코키리룰 자밥적여머거다~(사자가 코끼리를 잡아죽여 먹었다).”


언젠가는 한국인을 돕게 될 그날을 위해 오늘 밤에도 에두아르의 한국어 공부는 계속되고 있다. 남편이 작은 업적이라도 쌓아 깜짝 위인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까? 문득, 머릿속에 한 문장이 스친다. 

‘에두아르가 소매치기를 때려잡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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