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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sat Jul 06. 2020

엄마의 검정 고무신 시절

추억이 되어버린 기억


 나는 네  아이의 엄마다. 네 아이중 3호는 유독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편이다.


어느 날 “엄마! 엄마는 검정고무신 시대 사람이야 아니야?

아빠는 검정 고무신 시대 사람이래~!”  3호가 나에게 묻는다. 나와 두 살 차이 남편이 그리 말을 했다 하니 잠시 생각을 한 후 “엄마는..... 검정고무신 시대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음......어릴 땐 그런 것 같아!”라고 대답을 해주었다.


TV 애니메이션 검정 고무신에 관심을 보이며 재미있게 보고 난 후에 몇 번을 물어보는 건지...

어느 날은 함께 검정고무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유년시절 내가 검정 고무신 사람이라는 것을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적어도 70년대에 유년 시절을 살았던 나는 꽃피는 따뜻한 봄이 되면 뒷산과 들로 나가 나물도 캤고, 동굴 탐험을 한다고 촛불 켜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 어디로 통하는지 보겠다며 그 안을 헤매고 다니며 온 동네를 누비고 다녔다.

동네 마당은 늘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한쪽에서는 구슬치기 놀이를 또 한쪽에서는 땅따먹기 놀이, 다방구 놀이, 딱지치기, 구슬치기, 숨바꼭질, 공기놀이 등등...

그 조그만 동네에서도 나름 놀이의 유행이 있었던 것 같다. 껌을 씹다가 벽에 붙여놓고 몇 번을 씹어 대던 기억, 구멍가게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연탄불에 옹기종기 모여 쫀드기도 구워 먹고 달고 나를 해 먹으며 동네 아이들과 깔깔 대던 기억이 난다. 그마저도 돈이 없으면 구경만 하며 '한입만'을 수없이 말해야만 했다.


여름이면 개천에 나가 가재도 잡고 개구리도 잡고, 개울가에서 속옷만 입고 물장난하며 놀기도 했다. 몇 푼이라도 간식비를 받은 날엔 타원형 아이스 통에 검정 고무 뚜껑을 열고 포장도 없는 꽈배기 모양의 아이스를 50원에 사 먹었다. 아버지가 월급 받아오는 날 150원짜리 부라보 콘 내지는 공작새라는 동물 모양의 비스킷을 먹는다면 그날은 횡재를 한 날이다.


겨울이 되면 비료 포장지로 비탈진 산 끝자락에서 눈썰매를 신나게 타고 놀았다. 함박눈이 오면 눈을 굴려 눈사람도 만들고 편을 나눠 눈싸움도 했다.

기나긴 겨울밤 메밀묵과 찹쌀떡을 파는 아저씨의 목소리는 친할머니 집 아랫목에서 이불 깔고 하던 화투놀이의 진가를 맛보기엔 일등 공신이었다.




행여 누구네 푸세식 화장실 똥 푸는 날엔 온 동네가 똥 냄새로 가득해서 인상을 쓰며 코를 막고 다녔다.

똥 지레 아저씨와 만나기라도 하면 ‘우웩’하며 행여 튈까 싶어 벽에 딱 붙어 지나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가 지나가고 한 참 뒤에서야 참고 있던 숨을 한 번에 크게 내쉬고는 ‘에 휴~ 이제 살았다’하며 큰 숨을 몰아 쉬곤 했었다.


 그리고 큰언니의 하얀 카라에 검정 교복도 생각난다.

둘째 언니가 중학생이 되던 때부터 교복 자율화가 되어 중 고등학교 언니 오빠들의 검정 교복 입은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온 국민이 잘살아 보자는 취지로 ‘새마을 운동’과 함께 동네 사람들 모두 나와 동네를 청소하고 학교에서는 쥐를 잡은 증거로 쥐꼬리 검사까지 하던 시절, 버스에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버스 안내양 언니에게 토큰이나 회수권을 내야 버스를 탑승할 수 있었다.

안내양 언니가 버스 벽을 힘차게 '쾅쾅' 치며 “오~라~이~” 하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수동으로 문을 닫았던 기억이 이젠 아련하기만 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가물거리지만 버스 안에서 아저씨들이 담배를 피우던 기억도난다.


학교를 가려면 30분 이상 빡빡 산을 넘어야만 학교를 갈 수 있었다. 학생 수가 많아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빡빡 산 넘어 학교가 있었던 그곳이 내가 사는 서울 아래 또 다른 서울이었던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같은 연배의 지인들에게 해주면 “우리 같은 서울에 산거 맞아? 혹시 시골에 산거 아니야?” 하며 나를 시골 촌구석에서 살았던 사람처럼 신기해한다.

개발이 되지 않은 아주 작은 동네에서 살았었  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 모든 일이 생소하지 않고 나의 어릴 적 경험으로 추억이 되어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사우디로 외국인 노동자로 계신 전후 유년 시절의 나는 번동이라는 아주 작은 동네에 살았다.

한 가지 더 기억이 나는 것은 사진사 아저씨가 뒷배경을 리어카 같은 것에 꾸미고 다니면서 돈을 받고 사진을 찍어주러 다녔다. 그래서 사우디에 계신 아버지께 보낼 가족사진을 찍었었다. 유일하게 한 장 남은 아버지가 없는 가족사진을 몇 해 전 둘째 언니의 앨범에서 본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외국인 노동자 생활로 사우디에서 돈을 벌어 오셨고 우리 집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신 후 수유리라는 넓은 세상에서 살기 시작한 것이다. 시골 읍내에서 시내로 이사한 느낌이라 고나 할까? 마치 개구리가 우물 안을 벗어 나온 것처럼 말이다.

나는 시골 촌구석에서 살지 않았다. 어린 시절 서울 하늘 아래 지인들보다 아주 작은 동네에서 살았을 뿐인데 나는 검정 고무신에 나오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어있는 것이다.



  3,4호와 함께 본 검정 고무신을 통해 나는 추억여행에 소환이 되어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하며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얼마 만에 웃어보는 건지.... 추억이 나를 웃게 했다.

내가 살았던 수유리는 쌍문동과 가까웠다. 쌍문동을 배경으로 제작된 '응답하라 1988' 역시 나의 사춘기 시절을 소환하는 추억의 드라마이다.

 나와는 달리 나의 자녀 사 남매들은 참 풍요롭고 좋은 세상을 살고 있다. 현재의 나도 그 세상을 누리고 있음에 감사해야 할 것들이 참 많다.

하지만 그 좋은 세상이 병들어가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두렵고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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