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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밤 Dec 27. 2020

영화가 사랑한 얼굴을 찾아서

<휴고>, 이토록 개인적이고 창의적인 영화의 순간들

그 시절 영화의 세계란


  정확하게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영화를 봤다. 코흘리개 미취학 아동일 적부터 그래 왔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영화를 봤다'기 보단 '영화를 좋아하는 부모님 곁에 앉아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암전된 상태에서 숨죽인 채 아주 경건해 보이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기다리는  마치 신성한 종교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한 영화적 분위기마저도 맘에 들어서 웅장한 음악과 함께 영화가 시작되면 나도 모르게 가슴팍에 두 손을 모았다. 더 근사한 건 영화가 끝난 뒤 '존 말코비치의 연기가 어떠니, 이번에 개봉한 스필버그의 영화는 뭐니'하고 이어지는 어른들의 대화였다. 실로 난해하기 짝이 없는 이름들이었지만 이를 입에 올린다는 것 자체만으로 꽤 멋지고 근사해 보였다. 나도 저기에 끼고 싶다-는 지적 허영심은 영화 속 얼굴과 이름들을 찾아 공부해보라고 은근히 부추겼. 그렇게 영화의 세계에 스며들었다.


  감독이라던가 배우라던가 하는 것에 익숙해져 갈 때쯤 아빤 동네마다 하나씩은 꼭 있던 비디오 대여점에 나와 동생을 데려갔다. 여기는 비디오나 DVD를 빌릴 수 있는 곳이란다, 한 달에 만원 정도 넣어놓을 테니 이젠 너희가 직접 원하는 영화를 빌려와도 좋아. 그때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대여점을 들락거렸다. 같은 감독이나 배우의 작품을 연달아 보기도 하고, 숨겨진 고전 명작을 찾아 구석 칸의 비디오들을 뒤적여댔다. 고대하던 영화를 누군가 먼저 빌려가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그때의 속상함과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IPTV나 넷플릭스 등을 통해 시간과 장소의 구애 없이 손쉽게 영화를 접할 수 있는 요즘의 시대 정서와는 많이 다르겠지. 누가 언제 반납할까 손꼽아 기다리며 대여점 문턱을 넘나들던 애타는 심정을 요즘 애들은 알려나 몰라.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어김없이 영화와 사랑에 빠지고 극장을 찾는 이유는 비슷할 게다. 현실과 닮은 듯한 또 다른 세계를 향한 동경과 갈망. 경험해보지 못한 허구적 리얼리티를 통해 갱생되는 일상의 환기. 영화는 우리를 물랭루즈 속 화려한 캉캉춤의 향연으로 불러들이고, 절대반지를 파괴하려는 반지 원정대와 함께 모험을 떠나게 만들며, 이루어질 수 없는 연인의 눈동자에 건배를 건네는 카사블랑카의 한 사나이를 마주하게도 한다. 그 가운데 관객은 현실과 가상의 기로에서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무엇을 택할지 즐거운 고민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헌데 가장 초창기 버전의 영화는 이러한 우리의 눈높이엔 살짝 못 미친다. 그저 기차가 지나거나 마차와 사람들이 혼재하는 거리의 찰나를 촬영한 영상 클립 정도랄까. 그 당시의 영화가 '활동사진'이라 불리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스토리가 배제된 무의미한 장면들의 나열을 영화적 마법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은 최초의 영화 제작자 '조르주 멜리에스'였다. 영화 <휴고>는 바로 이 위대한 영화쟁이에 대한 존경과 찬사를 담아 건네는 아름다운 한 편의 헌정시다.




<휴고>, 영화가 사랑한 얼굴을 찾아서


(좌)  <휴고(2011), 마틴 스콜세지 감독>  /  (우) 주연배우들에게 디렉팅 중인 마틴 스콜세지

  주인공인 '휴고'는 파리의 어느 기차역 시계탑에서 시계를 고치며 살아가는 고아 소년이다. 죽은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로봇 인형을 수리하기 위해 장난감 가게에서 공구들을 훔치던 휴고는 곧 주인 할아버지에게 덜미를 잡힌다. 그런데 이게 웬걸. 로봇의 비밀을 파면 팔수록 점차 드러나는 진실은,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이 할아버지가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선구자적 감독 조르주 멜리에스라는 것. 그러면서 영화는 멜리에스라는 이 실존 인물이 얼마나 뜨겁고 순수한 마음으로 영화를 제작했었는지를 조명하고 그가 펼쳐낸 마법 같은 순간들을 수려하게 스크린에 옮겨 놓는다.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인 브라이언 셀즈닉의 <위고 카브레>를 원작으로 둔 이 영화는, 단순히 어린이용 판타지 장르로만 분류하기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물론 홍보사 측의 의도가 다분해 보이는, 포스터 속 어딘가 '해리 포터'스러운 이미지와 '명품 가족 영화'라는 문구는 그러한 오해와 의심을 사기 딱 좋지만 말이다. 특히 이 영화는 <택시 드라이버>, <디파티드>, <아이리시맨> 등 비교적 색이 짙고 묵직한 영화들을 연출한 거장 마틴 스콜세지가 제작 및 감독을 맡았다는 점에서도 눈여겨볼만하다. 자신의 막내딸과 함께 이 책을 읽었다는 감독은 책의 내용에 흠뻑 빠져들었고 이내 영화로 만들리라 결심한다.


(좌) 조르주 멜리에스를 연기한 벤 킹슬리 / (우) 멜리에스의 SF영화 <달세계 여행(1902)> 중 가장 유명한 장면

  원작자와 감독이 흠모해 마지않는 조르주 멜리에스는 '영화는 꿈을 사로잡고 실현하는 매혹적인 도구'라고 믿었던 인물이다. 전용 극장도 가진 꽤 잘 나가는 마술사였던 그는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최초의 영화(라기엔 그저 기차가 지나가는 1분 남짓의 영상)마음을 빼앗겨버린다. 즉시 영화사와 제작 스튜디오를 세우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마술 트릭과 연극적 요소를 사용하여 이전에 없던 환상적이고 극적인 장면들을 오직 카메라만을 통해 연출해내고야 만다. 특히 현재까지도 사용되는 페이드 인/아웃과 같은 시각효과와 편집 기술, 스토리 보드 및 각종 영화미술 기법을 고안해내며 500여 편이 넘는 개성 넘치는 영화들을 제작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한다.


  그러나 세월은 야속한 법. 뒤이어 영화산업에 뛰어든 새로운 경쟁자들에게 밀려남과 동시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에 따라 그의 영화들은 서서히 잊혀진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인은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골방 뒷켠 늙은이가 되어 초라한 장난감 가게로 삶을 연명할 뿐이다. 그러다 그의 오랜 팬인 어느 잡지 편집장이 우연히 이를 발견하면서 멜리에스의 명성과 작품들은 다시금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사연과 영화를 사랑했던 멜리에스의 삶은 여기 <휴고>에서 제대로 품격 있게 오마주 된다. 그는 이제 많은 영화팬들의 마음속에 '영화가 사랑한 얼굴'로 녹진히 남아있을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에서 가장 창의적으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곧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기생충>으로 각종 국내외 시상식을 휩쓴 봉준호 감독은 지난 2020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소감 도중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언급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곧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영화를 공부하던 어린 시절 우연히 책에서 접한 당신의 이 한마디가 마음에 아로새겨졌다며 경의를 표하는 봉 감독과, 그런 그를 향해 고마움과 격려가 담긴 미소를 보내는 스콜세지 감독. 짧은 순간이었지만 영화를 매개로 국경과 언어를 넘어선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되었음을 느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극도로 창의적일 수 있다는 그 말의 의미를 한참 동안이나 곱씹어보면서.


  영화 <휴고>에서도 개인적인 힘이 창의적이고도 역동적인 모습으로 확장되고 변모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조르주 멜리에스는 영화에 대한 아주 사적인 애정만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걸출한 작품들을 창조한다. 휴고는 자신의 존재 이유와 쓸모를 찾고자 하는 열망을 통해 꿈을 잃은 멜리에스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스콜세지 감독은 자신이 매료된 이 영화계의 화려한 과거를, 사심을 듬뿍 담아 이토록 강렬하고 특별하게 재현해낸다.


  꿈과 희망을 찾아 나선 한 소년의 여정을 통해 망각될 뻔한 어느 영화인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이 작품이 개개인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공감을 사고, 고전적이면서도 독창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극이 끝나자마자 나는 또 볼만한 영화는 없나 하고 리스트를 뒤적인다. 집중의 흔적으로 아무렇게나 굳어버린 몸뚱이를 이끌고 재차 영화의 세계로 나아가게 만드는 거장의 마력실로 놀랍다. 각자 저마다의 사적인 편린에서 물꼬를 터서 삶의 다양한 모양새로 물길을 내는 수많은 영화들은 언제나 나를 감탄하게 한다.


  어릴 적 주말마다 종종 향했던 극장과의 조우가 올해는 무척이나 뜸했다. 영화 시작 전 희여멀건한 2등신 캐릭터들이 나타나 대피 안내를 빙자한 타이어 광고를 하는 것조차 그리워지는 건, 바야흐로 전염병의 시대라서 그렇다. 아랑곳 않고 꿋꿋하게 커튼을 치며 희미한 무드등에 의존한 채 방 안을 작은 암실로 만들어본다. 영화가 사랑한 또 다른 얼굴들을 찾아 지리멸렬해본다.




*Trivia

 -스콜세지 감독의 저 말은 그의 자서전격 책 <비열한 거리: 마틴 스콜세지, 영화로서의 삶>에 수록된 한 인터뷰에서 나왔다고 한다. 좀 더 정확한 원문은 '영화는 왜 개인적이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영화의 관점이 명확하고 개인적일수록 더 창의적이다'라고 답한 것인데 이를 봉 감독이 차용한 듯하다.
 -감독의 대표작들 <좋은 친구들>, <셔터 아일랜드>, <아이리시맨> 등을 보고 나면 이 영화가 그에게 얼마나 특별한 도전이었는지를 더 실감할 수 있다. 모두 넷플릭스에서 감상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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