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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캔줌마 Apr 02. 2024

'사흘째 되던 날'

요한복음2장

 

 

요한복음 2장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잉? 갑자기 "사흘째"라고?'

다시 1장 말미로 되돌아갔습니다. 제가 무엇인가 놓친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어느 장소로 이동하셨다든지, 첫째 날, 둘째 날에는 무엇을 하셨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지요.

하지만 1장은 제자들을 가르치며 하신 말씀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면 혹시 1장 전반에 걸쳐 첫째 날에 제자 누구누구를 부르시고, 둘째 날에는 누구와 무엇을 하시고.. 하셨나?  다시 훑어보았습다. 하지만 역시 첫째 날과 둘째 날에 대한 설명은 없었습니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검색을 하기 시작했지요.


대부분 요한복음 2장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에 집중할 뿐 이 '사흘째 되던 날'에는 무관심했습니다. 어떤 이는 사흘이 의미는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변화의 시간'을 나타낸다고 했고요.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3일, 예수님이 무덤 속에서 3일...

글쎄요. '아무개의 혼인잔치'에 갑자기 '변화의 시간'?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뒤져보았습니다. 역시! 네이버님은 모르는 없으시죠.

이 '사흘째 되던 날'은 화요일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화요일에' 혼인 잔치에 가셨다는 말입니다. 왜 '사흘째'가 화요일이냐. 유대인들은 일주일간의 날들을 월화수목.. 같은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대신 첫째 날(일요일), 둘째 날(월요일), 셋째 날(화요일)... 이런 식으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창세기 1장에 묘사된 7일간의 천지 창조와 관련된 성서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 하신 것을 시작으로 둘째 날을 지나 이 셋째 날에는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땅이 드러난 후 각종 식물들이 만들어졌는데요, 이것에 대해 성경에서는 다른 날들과는 달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두 번이나 보여줍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셋째 날 즉, 화요일을 축복이 두 배인 날로 생각해서 결혼식을 화요일에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하나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월화수목... 같은 이름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은 이 명칭들이 이방신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딘, 토르, 프레야... 같은 신들의 이름이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등의 단어로 바뀐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우상숭배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너무나 일상적이고 누구도 그 의미를 크게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사용하는 요일의 이름들조차 바꾸어 부르는 것입니다.

 

이쯤 되니 유대인의 '열심'에 정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맞아요.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겠다고,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지키겠다고 족들과 생이별까지 불사한 민족입니다. 에스라 10장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본국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성전을 건축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동안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이들의 풍속을 따르고 있었던 것을 회개하며 이 아내들과 이들과의 소생인 자식들까지 끊어냈지요. 인간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보자면 하루아침에 남편을, 아버지를, 아내와 자식들을 잃는 대참사입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아내와 자식들을 끊어내는 마음, 가부장적 사회에서 하루아침에 남편 없는, 자녀들만 달린 홀어머니가 되는 천청벽력. 거기에 또 날벼락처럼 아버지를 잃는 자식들의 마음은 상상할 수도 없지요.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지키려 그들이 한 노력은 것은 인간이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합니다. 이 정도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종교에 미쳐 가정을 파탄 냈다고 욕을 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아요. 그들의 마음이야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이었지만, 또 다른 면에서 이들의 '열심'은 흡사 공산당 정권하에서 가족이나 친구마저 '사상'의 문제로 끊어내고 단죄하는 것을 연상시킬 만큼 지독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말 그대로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들은 이 최선을 다 한 '열심'의 결과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들처럼 거룩을 위해 '열심히' 많은 것을 했던 사람들일수록 그것들이 다 무용지물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님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 찢어지는 마음으로 가족 분해 대참사까지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게 다 무용지물이라니요.


게다가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중에는 누구나 인정하는 죄인중의 죄인들 - 창녀나 세리같은 사람들이 있었는걸요. 예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이들과 동급으로 평가 절하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창녀야 말할 것도 없고 세리에 대해 말해보자면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손가락질했던 소위 '인간 말종'이었지요. 우리의 역사에 빗대어 설명해보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같은 민족을 핍박했던 친일파 같은 기회주의자에다 '떼인 돈 대신 받아드립니다'를 직업으로 삼는 조폭을 합쳐놓은 것 같은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동안 하나님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감히 나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물론, 예수님 살해 사건에는 정치나 권력, 그에 따른 이해관계들도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의 권력이나 영향력의 근간에는 그들이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며 금욕하는 것에 대한 대중의 존경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이러한 거룩을 위한 '열심'을 무가치한 것으로 비판하시는 예수님을 인정한다는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자신을 부정하고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결단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보통 일이 아니지요.


저라면 달랐을까요. 제가 만약 그 시대 그곳에서 살며 평생을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참아가며 금식을 밥먹듯이 하고 내가 놀고 싶을 때 놀고 자고 싶을 때 자지 못하며 예배와 기도, 봉사와 구제 활동에다 다 기억하기도 힘든 셀 수도 없는 율법들을 지키며 살았다면.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떳떳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내가 그 힘든 것들을 그동안 어떻게 참아내며 지금껏 버텨왔는데! "

"예수, 당신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따위 소리를 지껄여! "

"내가 그동안 하나님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감히 나를 독사의 자식이라고?!"


역시 분노에 부들부들 떨며 어떻게 하면  예수라는 사이비 교주를 제거할까 골몰했을 것입니다. 모든 짐을 내려놓고 나에게 오는 말씀 따위는 당연히 들리지 않을 것이고요.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을 백번 이해합니다. 저라고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흔하디 흔한 화요일인 요한복음 2장 1절의 '사흘째 되던 날'은 이제 저에게 다른 의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힘으로, 나 스스로 구별될 수 있다고 믿고 행하는 '열심'.

그리고 예수님을 죽여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나의 의(義). 


제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은혜 앞에 당당하고자 하는 동기로 '열심'을 내어놓는 한, 저 역시  예수님 살해사건의 공범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사랑과 은혜 앞에 무슨 수를 써도 당당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조차 저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허락하여 선물로 주셨기에 얻은 깨달음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원수인 저를 사랑하심에 감사합니다.

제가 어떻게 해도 갚을 수 없는 그 사랑과 은혜앞에 무력함을 알게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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