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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캔줌마 Apr 02. 2024

그럴만하지 않은 사람들

4 복음서


저는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칩니다. 그러다 보면 가끔 학부모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아요.

“우리 아이가 미술을 전공으로 할 만한 소질이 있나요?”

대부분 이런 질문의 의도는 한마디로 싹수가 있으면 투자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아이들은 이렇게 자신의 타고난 재능이나 노력 여하에 따라 “할 만한 아이”, “할만하지 않은 아이"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저의 학생들 뿐만이 아니죠. 학교에서는 시험으로, 회사에서도 각각 자신들이 정한 평가의 잣대로 누군가를 어떠한 자리로 부르는 것에 대해 '그 사람이 그럴 만 한지' 최대한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전혀 특이한 일이 아니고 우리 세계의 상식이자 룰입니다. 아프리카였는지 아마존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오지의 부족들도 어떤 자격, 어떤 타이틀을 누군가에게 주기 위해서는 나름의 관문을 통과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과 논리를 가지고 있는 저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왠지 무지와 미련의 냄새가 폴폴 풍겨 나오는 사람들. 한마디로 '그럴만하지 않은데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최초로 접선하셔서 부르시는 장면들에서도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 삼으시려고 찾아가신 사람은 신앙을 목숨같이 여기며 여태까지 성경을 100독 이상 했고, 해마다 제자 훈련에 빠지지 않았으며, 어제도 금식하며 기도를 했고 새벽부터는 새벽예배에 나가있는 김집사님 같은 독실한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먹고살기로 허덕거리고 있던 어부들이었지요.


밤새 허탕을 친 베드로가 예수님의 명령대로 하여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를 잡게 되자마자 예수님 말씀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이것도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저 같은(MBTI에서 S와 T를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보기엔 필시 뭔가에 홀린 듯한 비 이성적인 행동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조언을 해 주어 직업적으로, 혹은 사업적으로 작은 성과를 보았다 한들 생업을 다 버리고 그 사람의 제자가 되겠다고 당장 따라나선다? 글쎄요.

저라면 예수님과 딜을 하려고 했을 겁니다. 오늘처럼 물고기 있는 곳을 집어주시면 제가 저의 배와 장비와 노동을 투입하여 물고기를 잡고, 수익은 5:5? 6:4? 에이~ 예수님은 말만 하셨으니까 그 정도 받으셔도 되지.


그런데 만약 그런 딜이 통하지 않고 굳이 제자 삼겠다고 하신다면 "생각 좀 해 보고요." 한 뒤에 3일쯤 고민하다가 '그래. 투자한다 생각하고 좀 따라다녀 보자. 빨리 비법을 배워서 복귀해 돈 많이 벌어야지.' 하며 '저양반을 어떻게 구워삶아 빨리 비법을 빼낼까' 하는 속내를 숨기며 예수님 앞에 나타났겠지요.


저처럼 신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엄마 찬스까지 동원해 예수님이 대권을 잡아 집권하시면 한자리 크게 달라고 로비를 하다가 동료 제자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셔서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마다 오히려 사람들을 피해 다니셨는데 이런 예수님을 보며 현실정치에서 집권하실 것으로 기대한다.. 앞뒤가 맞지 않지요.

이것을 보면 제자들도 저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사역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저처럼 자신의 욕심과 야망에만 관심이 있고 가르침과 사역은 물론,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던 것 같아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버지니이다'라고 고백했지만 베드로가 진정한 깨달음으로 이렇게 말했는지는 천국 가면 만나서 진위여부를 가려보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이 하시려는 것들을 반대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불호령과 함께 '사탄' 소리까지 들은 것만 보아도 냄새가 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갑자기 왜 그렇게 예수님이 자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셨는지도 갑자기 이해가 됩니다. 제자들이 도대체 말귀를 못 알아먹으니 고구마 100개는 삶아 드신 것처럼 답답하지 않으셨을까요?


야, 잘 들어. 진짜로, 정말로 내가 말하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믿지 않았다는 마지막 증거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기 전 모든 것을 말해주시고 다시 살아날 것 까지도 무려 3번이나(마 16:21; 17:23; 20:19) 말해주셨지만 아무도 이를 기다린 사람은 없었습니다. 기다리기는커녕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이가 와서 이를 알려주었음에도 믿지 않았지요. 제자들이 살아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난 것은 이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부활의 예언을 믿고 기다려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떠난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자, 이 정도면 냄새만 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들은 명백히 예수님의 제자가 될 만한 자격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사역을 하기 시작하였지요. 성령을 받은 것도 이들이 그 사이 어떠한 자격을 갖추었거나 능력치가 향상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자, 지금부터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하루에 10시간 이상 기도하고, 내가 특별히 사탄에게 외주로 맡긴 테스트에서 3관왕을 모두 차지한 사람에게는 성령을 주겠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저 아무 조건 없이 주신 것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그들이'제자 될만한' 어떠한 점도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절대로 '그들 자신의 어떠함'과 관계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그 주권으로 택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일방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제가 십 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책가방을 메고 집으로 걸어가던 저에게 어떤 아주머니가 예수님 믿으라며 전도지를 내밀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하나님이 주인이신 삶과 내가 주인인 삶 중 어떤 을 택하겠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때 별 질문 같지도 않은 걸 물어본다는 식으로 "아니, 내 삶의 주인이 나지, 왜 하나님이에요? (어이없네)" 하고는 갈 길을 갔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을만한' 사람이 전혀 아니었지요.

저의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은 지금 제가 크리스천이라고 하면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네가?", "정말?" 이럽니다.


저의 믿음도 '저의 어떠함'으로 그게 생길만해서, 가질만해서 갖게 된 것이 전혀 아닙니다.

택하여 부르시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나 봅니다.

은혜로, 선물로 주신 것이니 할 것이라곤 하나밖에 없지요.

그저 감사. 감사.


하나님.

아무것도 아닌, 자격 없는 저를 조건 없이 부르시고 사랑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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