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이라 부를 수 없었던 두 번의 입사, 그리고 두 번의 퇴사.
아니, 못했다고 해야 하는 게 맞는 걸까?
꼴에 아무 회사나 가고 싶지 않았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정말 가고 싶은 회사들을 리스트업 해서 순서대로 정리한 뒤 사나흘 차이를 두고 한 번에 하나씩 순차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다 보니 한 번에 수십 개의 회사에 이력서를 넣는 사람들보다 당연히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도 적을뿐더러 그 당시 연말이라 구인을 하는 회사도 많지 않았다. 학원 과정이 끝나니 현재 나이 이미 28살.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빨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주변 친구들 대부분은 이미 취업해서 회사를 다니거나 심지어 대기업에 취직해 높은 연봉을 받는 친구들까지 보고 나니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현재 구인중이 아니어도 가고 싶었던 회사는 일단 지원해보자 라는 마음으로 상시 모집에 이력서를 넣길 반복했다. 연락 오는 회사는 거의 없었고 그렇게 연말이 지나고 내년 상반기에나 지원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던 중 2013년 11월,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꽤 중요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데... 그 얘긴 다음 에피소드에 풀어보려고 한다.
이 회사는 내가 가고 싶던 회사 리스트의 상위권에 있던 회사였기 때문에 면접 연락이 왔을 때 정말 날아갈 듯이 기뻤다. 회사 규모는 10인 미만의 아주 작은 스튜디오였지만 각종 케이블방송 채널의 네트워크 디자인( 예를 들면 프로그램 시작 전 연령고지와 같은 것들)이나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한 회사들의 영상도 제작해오고 있던 회사였다.
기대감을 안고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을 보러 갔던 날.
주말이라 그랬는지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면접은 대표님과 나, 이렇게 둘이서만 진행되었다.
인적사항, 학력, 포트폴리오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회사 내규나 일하는 방식 등에 대해 설명을 들었는데 그때 들었던 말 중 가장 인상적인 말이 있었다.
우리는 절대 밤샘 작업은 하지 않아요
네.....? 그럴리가...진짜요?
세상에 밤샘 작업이 없다니 내가 들었던 얘기 중 가장 달콤하게 들렸다. 요즘은 그래도 나아졌다고 하지만 영상업계 자체가 야근은 물론 밤샘 작업을 하는 경우가 꽤 많다. 물론 이유는 촉박한 마감기한과 그 촉박한 마감기한을 주는 클라이언트 때문이다.
그런데 밤샘을 하지 않는다니... 늦어도 차가 끊기기 전에 집에 보내준다니 이 회사를 더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면접을 보고 나서 며칠 뒤, 합격 연락이 왔다.
영상을 배우고 나서 취업한 첫 회사.
첫 영상회사 취업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설렜고 출근일이 이렇게 기다려져 보기는 처음이었다.
출근하면 처음부터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을까?
제발 사수가 실력도 있고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이제 첫 회사인데 너무 나대지 말자.
출근하기 전부터 다양한 생각들로 이미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고 드디어 첫 출근날 아침에 밝았다.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준비를 하고 멀끔하게 차려입은 뒤 지하철에 올랐다. 하지만 회사 앞에 도착해보니 사무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앞에는 나처럼 문 앞에 서서 서성이고 있는 한 명이 보였다. 혹시나 하고 말을 걸어보았다.
" 혹시.. 이 회사 직원이세요?"
" 아... 네. 그런데 오늘 첫 출근인데 문이 닫혀있네요."
" 그러시구나, 저도 오늘 첫 출근이라... 그럼 제가 대표님께 연락 한번 드려볼게요."
" 여보세요? 대표님 안녕하세요. 오늘 첫 출근이라 회사 앞인데 아무도 없는지 문이 잠겨있어서요!"
" 어~ 나 지금 가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 네 알겠습니다~!"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 왜 문이 잠겨있는 거지?
속으로 혼자 생각했다. 다들 오늘 쉬는 날인 건가... 왜 이 시간까지 아무도 없지?
그러는 사이 대표님이 도착했고 우리 셋은 함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각자 자리를 배정받고 일단 앉았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왜 사무실 문이 닫혀있었고 아직까지 아무도 오지 않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이유인즉슨, 최근에 사무실 직원들이 한꺼번에 전부 퇴사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표만 있는 회사라니... 거기에 신입직원 둘? 그렇다면 나를 이끌어줄 사수도 없이 이렇게 셋이서 일을 한다고? 아니지, 다시 생각해보니 대표님은 일을 안 할 테고 그러면 이 사람과 나 둘이서 프로젝트를?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일단 어이가 없었지만 속으로만 생각하고 대표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일단 지금은 너희 둘 뿐이지만, 나갔던 대리급 직원 하나가 다다음주부터 다시 출근할 거야. 그리고 팀장직과 일반 사원도 추가로 뽑을 예정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알겠지?"
알긴 알겠는데... 과연 이대로 괜찮을까?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아무리 1년 동안 영상을 배웠다고 해도 이제 막 첫 회사에 입사한 생초짜 신입 둘이서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설상가상으로 대표님은 우리 둘에게 첫 프로젝트로 우리은행의 홍보영상을 맡겼다. 둘이서 삼 일간 고군분투했지만 그냥 딱 거기까지. 제대로된 아웃풋이 나올리 없었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나에게 하나의 개별 프로젝트가 더 주어졌다.
그렇게 당황스러운 첫 주가 지나고 다음 주 월요일 아침.
다른 신입 직원은 출근한 지 삼일 만에 그만두었다. 대표님도 혼자 은행 프로젝트는 무리라고 판단하셨는지, 개별 프로젝트만 일단 진행하라 하셨고 그렇게 대표님과 일주일을 보낸 뒤 사수가 들어왔다.
그렇게 사수와 둘이서 우리은행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도중에 팀장님과 사원 한 명이 더 구해지고 이제 뭔가 회사다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사한 지 한 달 만에 그만두기로 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첫 번째. 일을 배우기 어려웠던 환경.
그 회사의 포트폴리오가 마음에 들어서 입사 지원을 했던 것인데 그 화려한 영상들을 만든 가장 에이스였던 직원은 대기업으로 이직했다고 한다.
두 번째. 첫 출근일로부터 한 달 동안 매일 막차를 타고 집에 갔다.
토요일에도 물론 출근했고 일요일은 집에서 자택 근무를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일의 양이 많았다.
세 번째. 과도한 중압감.
일개 신입 직원이었던 내게 주어졌던 규모가 큰 프로젝트들이 나의 어깨를 짓눌렀다.
우리은행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와중에 방송사 채널의 네트워크 디자인 전체에 대한 기획업무가 주어졌다.
추가로 새로 들어온 신입직원과 함께 게임 홍보영상을 제작하라는 업무까지 추가로...
나 이대로 가다간 죽겠다..
한 달쯤 회사를 다니고 나서 든 생각이었다.
결국 무언가를 배우기도 힘든 상황에서 일의 양이 많다 보니 매일같이 11시까지 일하다 막차를 타고 집에 가기 일쑤였다. 게다가 주말도 반납하며 일하고 있는 나를 보니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 해도 이런 식으로 가다간 몸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설상가상 일의 규모가 나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큰 프로젝트마저 직접 리드하며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 주어지자 몸은 물론 마음까지 힘든 상황이 오게되고야 말았다.
결국 대표님께 사직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사직서를 냈던 그 날, 카페에 앉아 약 두어 시간 동안 회사를 그만두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들었지만 나의 마음은 확고했다. 결국 그만두기로 말한 순간부터 약 2주 동안 회사를 더 다니면서 맡았던 업무들의 마무리를 하고 나서야 회사를 나올 수 있었다. 2주.. 당연히 회사에도 일을 정리하고 다음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게 맞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만두기로 한 날짜가 되었고, 대표님과 미팅을 다녀오는 차 안에서 일어났다.
" 내일(토요일) 정수기 홈쇼핑 광고 촬영이 있는데 너도 와서 도와주면 안 될까? 마지막 부탁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거절했다. 하지만 대표님은 끈질겼고, 혹시나 내가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월급이 제 때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최악의 생각까지 머릿속에 꽂히고 나자 결국 도와주기로 했다.
토요일 오전 9시까지 택시를 타고 파주 촬영장으로 갔다. 쪽 잠 잘 틈도 없이 타이트하게 밤새 촬영 보조하고 다음날 오후 2시쯤 되어서야 모든 촬영이 끝났다. 거의 30시간을 한 숨도 못자고 버텼던 거다.
나와 함께했던 사수, 대표님까지 우리 셋은 녹초가 되었고 돌아갈 때는 대표님의 차를 타고 갔다. 마지막 날까지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가 그래.. 이런 회사였던 거지. 빨리 그만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더더욱 강렬하게 들었다. 후에 이야기 들어보니 대표님 그날 밤새고 운전하시다가 강남에서 사고가 나셨다고 한다. 역시 사람이 너무 무리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문득 면접 당시 대표님께서 하셨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절대 밤샘 작업은 하지 않아요
결국 나의 첫 번째 회사는 이렇게 입사 한 달 반 만에 막을 내렸다.
두 번째 회사는 좀 다른 환경에서 일해보고자 영상만 만드는 작은 스튜디오가 아닌 꽤 큰 규모의 광고 에이전시에 취업을 했다. 이 회사는 스땡땡이라는 음료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모기업으로 둔 꽤 규모있는 에이전시였지만 군대식 문화에 찌들어있는 꼰대 같던 팀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일주일 만에 바로 그만두었다.
그렇게 두 번의 회사를 연이어서 퇴사하게 되자 같이 영상을 공부했던 한 동생이 내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럴 만도 하다. 첫 회사 들어간 지 한 달 반 만에 퇴사.
2주도 안돼서 바로 들어간 두 번째 회사는 들어간 지 1주일 만에 퇴사.
남들 보기에는 내가 못 버텨서, 끈기가 없어서 그만두게 되는 걸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조차 앞으로 어떡하려고 그러냐면서 질타를 하셨으니 말 다 했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버티는 게 꼭 답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또 다른 기회는 분명히 또 찾아올 수 있고 그때 그 기회를 잡기 위한 준비만 되어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 기회를 잡았고 그때 잡은 기회를 발판 삼아 현재 프리랜서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만일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
지금처럼 일 년에 몇 번씩, 혹은 길게 몇 달씩 여행을 다니는 기회가 있었을까?
하고 싶은 시간에, 하고 싶은 장소에서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 버는 만큼 벌면서 살 수 있었을까?
그만두지 않고 열심히 회사를 다녀서 6년 차가 된다 한들, 지금과 같은 여유는 찾아볼 수도 없을뿐더러 네이버나 카카오와 같은 대기업의 영상팀으로 가지 않는 이상 연봉 4천 이상은 현실적으로 받기가 힘들다.
물론 프리랜서 생활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요즘은 한 달이 넘도록 일이 없을 때도 종종 있는데 그럴 때마다 앞으로 영영 일이 없어서 실업자 신세되는 건 아닌지 매번 전전긍긍하며 우울해하거나 걱정한다.
그리고 혼자서 모든 업무를 다 처리해내야 할 때 느끼는 중압감과 책임감은 생각보다 크다.
그렇게 때문에 가끔씩 혼자 일하는 게 좋으면서도 외롭다고 느낄 때가 몇 번씩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부분들을 감수하고 인내하며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건 내가 열심히 일한 만큼 돈을 벌어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일에 대한 책임이 오로지 나에게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내 일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는 이상한 사수가 없다는 것. 오로지 나의 의견(물론 클라이언트의 의견이 있지만)과 나의 생각만으로, 원하는 방식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크나큰 장점이 아닌가 싶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말도 있듯이, 주변에 회사 다니는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항상 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닌 가장 가까이에 존재하며 나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더라.
회사를 그만두는 게 물론 능사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버텼으면 의외로 더 잘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겠지.. 인생은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세상에 정답은 없듯이 결국 다른 길을 택했고 현재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딱히 사람들에게 지금 회사가 마음에 안 들면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회사를 그만두든 계속 다니든 후회 없는 선태을 하길 바랄 뿐이다.
아마 지금 프리랜서가 아닌 다른 회사에 취업을 해서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이 되었을지라도
나는 그 때 그 두 번의 퇴사를 절대 후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