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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껍질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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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세처럼 Jul 06. 2022

가슴은 꿈을 꾸고 눈은 내일을 보고 손은 오늘을 산다.

껍질을 깨고(4)

내 이야기를 하려면 나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내가 지금과 같은 삶의 태도, 생활방식을 갖게 된 것을 이해하는 데는 이것만큼 좋은 소재가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게 뭐야?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고난이 있는 법이고, 그것을 이겨냈거나 또는 회피했거나 아니면 져버렸거나 그런 것들 중의 하나를 겪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10년이 넘게 노력했고, 매번 노력을 할 때마다 실패를 거듭했으며, 실패를 할 때마다 내 삶이 싫어졌었다.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했고, 무기력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나의 껍질은-깨기 전에도, 깬 이후에도- '말 더듬'이다. 이 말 더듬은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나를 뒷목을 움켜잡아 그러지 못하도록 했다. 나를 위축시켰으며, 창피를 느껴 자존감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종당에는 나의 꿈-어린 시절부터 꿈꾸어온-을 포기하게 만들기까지 했었다.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은 안 하니만 못하는, 하더라도 알맹이가 없는 패티 없는 햄버거라 할 수 있다.


쉬는 시간, 한 아이가 책상에 앉아있고,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그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한 아이가

"야, 너, 선생님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왜? 나,나,나,나, 선생님이 하,하,하,하,하고 싶고, 되( 잠시 멈추고 침을 꿀꺽 삼키며) 될 수 있는데"

"네가 할 수 없다는 걸 얘기하는 게 아니야, 다만"

"다.다.다. 다만? 다만 뭐?"

"그러니깐, 네가 걱정돼서 그래. 너 말을 심하게 더듬잖아. 너 선생님이 돼봐야 아이들한테 놀림만 받을 걸?"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교실에 종종 있었던 풍경이다. 선생님을 꿈꾸는 나에게 친구들은 종종 그 꿈을 포기하라고 말했다. 나에게 꿈의 포기를 강요하거나, 나를 업신여겨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오기로라도 꿈을 포기하진 않았을 것이다. 나를 걱정해주는  아이들이 처음에 그 얘기를 했을 땐, 콧방귀를 뀌며 거들떠보지도 않았었지만, '선생님이 되었는데, 말을 더듬는다고 아이들이 놀리면 어쩌냐?'라는 친구들의 진심 어린 걱정과 충고가 거듭될수록 내 생각도 점점 포기하는 으로 기울어져 갔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하던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어느새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으로 바뀌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면 안 되는 거 같아'라는 생각에 머무르기에 이르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친구들은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서 해준 충고들이었다.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진심으로 그것을 하기를 원했는지 충분히, 너무나 충분히 알고 있는데도 그런 조언을 해야 했던 친구들의 마음도 불편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말 더듬는 버릇은 선생님에겐 너무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땐 몰랐다. 친구들도, 나도. 삶에 숨겨져 있던 비밀을.  정말 간절히 원했지만, 결국엔 나는 그때 꿈을 포기했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고1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날, 목표했던 대학교와 학과의 이름을 지우고 책상에 엎드려 혼자 울던 모습이.  


내가 말더듬이라는 걸 처음 인식한 건 초등학교 3학년쯤이다. 말더듬에 관해 남아있는 최초의 기억이 그때이다. 수업시간 무엇인가를 발표하려고 했던 나는 입을 벌린 채 "아,아,아,아(소리가 나오지 않고 입속으로만)"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다가 "준수야, 왜 대답이 없어? 다른 사람?"이라고 선생님이 말했던 서글프고도 아픈 기억. 그 이후로 나는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 또는 발표를 해야 할 때(이때가 제일 심했다.) 말을 더듬었다. "어....... 어제는 제.....가...."내가 이렇게 말을 더듬을 때면 친구들은 웃었다. 그 웃음이 나는 너무 창피했다.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학교에 나오기가 싫었고, 살기 싫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학창 시절 많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중에 2개만 소개해보려고 한다.

우선 초등학교 때의 이야기이다. 5학년이나 6학년으로 기억나는데, 나를 유난히 놀리던 한 친구가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그냥 웃고 말았는데, 그 친구는 내 말투를 따라서 하곤 했다.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하거나, 또는 자기 말을 하는데 내 말투를 이용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 나면 친구들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난 그게 싫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나를 흉내 내는 것을 담임선생님이 발견하고, 그를 혼냈다. 다신 그러지 말라고 얘기를 하신 선생님께 대답을 하는 친구는 말을 더듬었다. 나를 따라 하다가 진짜로 더듬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선생님께 혼나면서도 말을 더듬는 자신에게 당황하던 친구의 모습은 한순간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에피소드는 결과적으로는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 친구는 나를 흉내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몇 개월이 지난 후 다시 원래대로 말을 하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말을 더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중학교 때 이야기이다. 그때 난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가 있었고, 친구들과 자리를 바꿔 그 여자애의 대각선 뒷자리로 옮겨 앉았었다. 사귀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서로에게 호감은 갖고 있었다. 영어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영어 지문을 읽게 시켰다. 난 할 차례가 아니어서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를 지목했다. 갑작스러운 발표에 긴장을 해서, 그리고 좋아하는 여학생이 바로 앞에서 보고 있다는 생각에 난 더욱 긴장을 했다. 읽으려고 했지만, 내 소리가 목구멍을 뚫고 나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입을 뚫지는 못했다. 물론 내가 말을 더듬다는 것을 모두가-선생님도 그 여자애도-알고 있었지만 창피했다. 여자애는 뒤돌아서 나를 보며 "준수야, 할 수 있어. 용기를 내. 넌 할 수 있어"라고 작게 속삭여줬다. 하지만 난 지문을 읽지 못했다. 그날 내가 영어를 제대로 읽었더라면 그날의 기억은 화사한 분홍빛으로 물들었겠지만, 내겐 어두운 암회색 기억이다.


초등학교 때, 그러니깐 내가 말 더듬을 처음으로 인식한 초3 때부터, 난 내가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 앞에서 발표도 못하고, 좋아하는 여자애 앞에서 말 더듬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으면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내 생각이 깨진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한 선생님께 나를 불렀다. "준수야, 너 말을 심하게 더듬던데, 그건 혀가 굳어서 그래. 혀 운동을 많이 시켜야겠다. 오늘부터 매일 알사탕을 먹는데, 깨물어 먹지 말고, 녹여먹어라. 입 안에서 혀로 알사탕을 이리저리 굴려가면서 혀 운동을 시키는 거야. 그리고 혼자서 소리 내서 책을 읽어보렴. 그럼 좋아질 거야."라고 말해주셨다. 유레카! 아니 할렐루야!라고 해야 할까?


"말 더듬는 건 고칠 수 있는 거야." 이 말은, 평생 말더듬이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내 안에 작은 희망의 씨앗이 뿌리를 내린 날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교실에서, 즉 수업시간에 사탕을 먹어도 되는 학생이 되었다. 청포도맛 사탕 봉지를 항상 가지고 다녔으며, 시도 때도 없이 입에 넣고 혀를 굴리면서 사탕을 녹여 먹었다. 사탕이 없는 날에는 바둑알을 들고 다니면서 입에 넣고 빨곤 했다. 하루는 깨진 줄 모르고 빨다가 날카로운 모서리에 입 안이 베여 피가 철철 나기도 했었다. 그리고 산에 가서 소리 질러가며 책을 읽기도 했었는데, 나의 말더듬의 강도는 전과 다름이 없었다. 하나도 좋아지지 않았다. 아니 하나도 좋아지지 않은 것만 같았다.


말더듬에 대한 획기적인 변화는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5월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학급 간부(반장, 부반장)들을 데리고 리더십 교육 같은 것이 있었다. 시내 여러 학교가 모여 호국원 같은 곳에 가서 3박 4일간 교육을 받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당시 난 간부가 아니었지만, 반장이 안 가겠다고 해서 내가 대신 가게 되었다.(지금 생각해도 우연의 일치 치고는 너무나 환상적이다) 당시 4개 분임이 있었고, 각 분임별로 2~30명 정도가 있었다. 우리 분임에는 나와 같은 반 친구가 있었고, 나머지는 모르는 친구들이었다. 첫날 자기소개를 할 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인생을 보람 있게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3박 4일간 쓸 예명으로 보람이라고 지었습니다. 저는 한 가지 안 좋은 버릇이 있는데요. 말을 할 때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그.그.그...그래서......."

말을 잘하다가, "말 더듬는 버릇이 있습니다."라고 말을 하는 그 순간, 말을 더듬을 때마다 나를 보며 비웃던 친구들의 모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사람들이 내가 말 더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내가 말을 더듬으면 나를 비웃을 거다. 어떡하지?'순간 그런 생각 번개보다 빠르게 떠올랐다.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팔에 닭살이 단단하게 돋았다. 입이 바싹 말랐다.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 분임을 맡았던 담당 선생님께서 기다리다 못해 다음 친구에게 소개를 하라고 했다.


"준수야, 너 아무래도 말 더듬는 거 심리적인 문제 같아. 너 말 잘하다가 그 순간부터 더듬더라"라고 같은 반 친구가 말했다.

"너, 처음엔 말 잘하다가 말 더듬다는 말 한 그 순간부터 더듬더라. 한번 잘 생각해봐."라고 그날 처음 본 친구가 내게 말했다.

"자네, 말 더듬는 거 심리적 요인이 강한 것 같군. 자네 처음에는 말을 잘했었네. 그런데 자네 스스로 그 말을 한 순간부터 더듬기 시작한 거지. 아무래도 사람들이 알게 될까 봐 겁이 나서 그런 것이 아닐까? 다음부터는 "난 말을 더듬지 않는 사람이야. 난 말을 잘하는 사람이야"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차분하게 말을 해보게나."라고 담당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세 명이 나에게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깨달았다. 그 순간 이미 나는 깨닫고 있었다. 한 날에 세명에게 아니 네 명에게 동시에 같은 얘기를 듣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남은 3일은 나도 모르게 무장해제된 시간이었다. 담당 선생님의 조언과 격려, 분임 친구들의 긍정적인 지지와 피드백,  스스로의 깨달음과 의지 속에서 말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리더십 교육이 끝나고 학교로 들어왔을 때, 친구들이 나에게 "준수야, 너 말하는 거 많이 좋아졌다."라고 말을 했었다.


첫 부분에 했던 얘기를 기억하는가? 말 더듬 때문에 선생님이라는 꿈을 포기했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때도 역시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시기상 리더십 교육이 먼저였고, 꿈을 포기한 것이 다음이다. 말더듬이 많이 좋아졌는데, 꿈을 포기했다고? 그렇다. 그럴 정도로 나의 말 더듬은 심각했고, 많이 좋아졌다 하더라도 부족한 수준이었다. 당시 친구들은 아무리 좋아진다 하더라도 선생님이 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그 친구들의 의견이 합리적이라고 나도 생각했었던 것이다. 나의 성장은 미미했고, 가야 할 길은 까마득히 멀었다. 그렇게 꿈을 포기했다.


꿈은 포기했지만, (당시 어쩔 수 없었다) 말 더듬을 고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의식적으로 고치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리더십 교육 때 선생님이 말하신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 최면을 걸고 말해보렴"이것을 무의식적으로 하려고 했던 것이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신입생 OT 때 말을 엄청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여러 가지 동아리에 가입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말 잘하는 사람처럼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말을 더듬기 시작하면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었고,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길을 감내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때론 왜 이 짓을 계속 하나 싶었다.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새로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또 말을 했다. 더듬었다. 혼자 상처를 받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말 신기하게도 새로운 사람과 말을 할 때, 말을 더듬는 버릇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시간이 점점 늦쳐졌다. 그리고 말을 더듬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말을 더듬는 강도 역시 점점 약해졌다. 그 변화가 너무 미미해서 초기에는 인식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어느 정도 지나자 저절로 알게 되었다. '입에서 힘을 빼는 법, 말을 더듬을 때 하는 행동, 어떻게 하면 말하는 게 좀 편한지' 등이 알게 모르게 체화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말을 하는 것이 편해졌다.


'말 잘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기'의 최고봉은 군대 훈련소가 아닐까 싶다. 그때 우리 대대에는 4개 중대가 있었고, 각 중대당 4개 소대, 각 소대당 4개 분대가 있었다. 한 분대는 16명이었다. 훈련소에 들어간 첫날인가 둘째 날, 분대장을 뽑았다. 총 64명의 분대장을 뽑았는데, 그중에 자원한 분대장은 내가 알기로 나밖에 없었다. 다른 분대장에 뽑힌 얘기를 들어보니, "여자 친구 있는 사람",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 "키가 제일 큰 사람"등등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조교들이 임으로 뽑았다고 했다. 내가 분대장에 자원한 이유는 "분대장이 되면 말할 기회가 많겠지!"라는 이유였다.


군대에선 "딱 중가만 해라"라는 말이 있다. 나서지도 말고, 쳐지지도 말라는 말이다. 근데 난 나서기를 선택했다. 분대장이 된 이후로 우리 분대, 또는 더 나아가 우리 소대가 때때로 곤란을 겪은 상황이 있었다. 내가 말을 더듬어서 제때 대답을 못했다거나, 또는 말을 많이 하려고 하다가 해선 안될 말을 해서 기합을 받는 다던가 말이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내 말 더듬 증상이 가장 많이 좋아진 것은 군대 훈련소 시절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군대는 내겐 기회의 땅이었다. 훈련소에서 만난 수많은 새로운 사람들, 자대 배치를 받으면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 매달 만나게 되는 후임병들, 26개월 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었고, 지속적으로 만날 때마다 "말 잘하는 사람처럼 말하기"를 계속 연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대를 했다.


복학을 한 그해, 대학교 게시판에 '발표불안 극복하기 집단상담'이라는 상담 프로그램이 있는 것을 봤다. 난 그 길로 달려가서 상담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8명이 한 그룹이 되어 집단상담을 했는데, 첫날 각자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였다. 그때, 내가 보기엔 다들 너무 발표를 잘했다. 나만 못한 것 같았다. 자기소개가 끝나고 소감을 말하라는데 8명이 모두 말하길 "다들 너무 발표를 잘하세요. 저만 못하는 것 같아요. 다른 분들은 왜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을 했다. 중요한 포인트이다. 8명 모두가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다들 너무 잘해요."에 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선생님이 말하길 "우리가 연설을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도 다 자기 나름 불안을 느낍니다. 그런데 자신만의 방법으로 다 컨트롤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못하고 다른 사람이 잘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보세요. 여러분 모두 오늘 그렇게 말했죠? 스스로만 못한다고 생각할 뿐, 다른 사람들은 다들 잘한다고 여기고 있는 거? 우리 5주간 열심히 얘기하고, 발표불안을 극복해봅시다."라고. 5주간의 집단상담이 끝난 후 "난 말을 잘하는 사람이야"라고 선언을 했다. 말 더듬 극복을 스스로 선언한 것이다.


말 더듬을 극복 했다고 선언한 그때, 나는 26살이었다. 말 더듬 때문에 선생님이란 꿈을 포기한 게 17살 때였으니,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고등학생 때 꿈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사범대학에 들어갔더라면, 나는 26살에 임용시험을 치렀거나, 또는 임용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인생에는 만약이라는 말이 없다곤 하지만, 그래도 만약에 그때 내가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지워질 수 없는 만약이다. 그로부터 1년 후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왜 선생님을 포기했었지? 아 말을 더듬어서였지? 지금도 말 더듬어? 아니? 그러면 선생님이 되기 위해 다시 도전해도 될까?" 10년 만에 선생님이란 꿈을 되찾고, 꿈을 향해 힘찬 항해를 시작할 수 있었다. 비록 고된 항해였지만, 길을 잃고 바다를 떠돌던 배가 등대를 발견한 것처럼, 내 목적 없이 학교를 다니던 10년의 방랑생활의 종지부를 찍은 날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10년에 걸친 이 경험, 말더듬이라는 껍질을 깨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갈 기회를 가졌던 이 경험은 내게 2가지 큰 가르침을 주었다. 아니 하나의 가르침을 주었고, 하나의 의무를 내게 부여했다. 가르침은 "비연속적이고 잠재적인 성장을 바라보는 태도"였고, 의무는 "이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라"라 이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그 의무의 일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가르침에 대한 얘기를 먼저 해보려고 한다. 가르침은 그 속에 있는 동안에는 몰랐다. 꿈을 포기한 후 10년이 지나서 다시 꿈을 찾게 되었을 때, 나의 삶을 뒤돌아 보며 "아하, 그랬구나"하고 순간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리더십 교육을 다녀와서 말더듬이 분명 좋아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같은 그 고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이라는 꿈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이 깨달음을 시간이었다. 분명 좋아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 포기해야만 했는가?


글로만 쓰기 어려워 그래프를 준비했다. 그래프를 보면서 이 글을 읽으면 좀 더 쉽게 이해가 될 것이라 믿는다.


출발점 : 초등학교 당시의 말 더듬 상태 추정치

말솜씨 : 선생님이 되기 위해 필요한 말하기 능력 추정치(그 당시 내가 바라보는)

중1 : 말 더듬을 고칠 수 있는 것이라고 처음 들었던 때

고1 : 말더듬이 대한 깨달음을 얻었던 시기, 그리고 꿈을 포기했던 시기

대1, 군대 등 작대기 : "말 잘하는 사람처럼"행동하는 시기

특이점 : 1. 그래프가 끊어져있다. 2. 점프식으로 성장한다.


중학교 1학년 때 말더듬이 고칠 수 있다는 말을 처음 듣고 알사탕을 먹고, 혼자서 소리 내어 책을 읽던 시기에 난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내 목표치에 한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되기엔 여전히 부족했기에 "난 원래 말더듬이니깐"라고 생각하며 도전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때 아주 조금이라도 분명 나아지긴 했다. 분명히.

(아,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그래프로 보여주기 위해서 말솜씨가 그림 안에 들어있지만, 당시 나의 심리적 거리감은 이보다 더 멀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그림밖에 그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리더십 교육 때의 경험은 정말 엄청난 성장이 있었다. 친구들이 모두 나의 말더듬이 좋아졌다고 말했고, 나도 그렇게 느꼈으니깐 말이다. 그런데 나의 눈은 여전히 말솜씨에 있었다. 어제보다 성장한 나의 모습은 미미하게 느껴졌다. 까마득히 먼 결승점만 보느라 어제보다 몇 걸음 더 걸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꾸준히 가면 갈 수 있는 길이였겠지만, 너무나 멀게 느껴졌고, 멀게 느껴진 만큼 나의 발전은 하찮게 여겨졌다. 어제보다 나아진 오늘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던 것이다. 목표만 바라보느라 지금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때는 나도 몰랐고, 친구들도 몰랐다. 그러기에 친구들은 나에게 꿈을 포기하라고 조언했고, 나는 그들의 조언을 따랐다. 당시엔 어쩔 수 없었다.  


각각의 막대가 수평선인 것은 "그 당시에는, 그 상황 안에서는 아무것도 좋아지지 않는다"라고 느껴지는 것을 뜻한다. 전혀 좋아지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도전의 동력을 점점 잃게 만든다. '해도 안될 텐데', '내가 원래 그렇지 뭐' 같은 패배의식이 점점 커지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도전을 포기하게 된다. 내가 매번 그랬다. 그런데 내가 알게 된 사실은 하나도 좋아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몸에 축적되고 있거나 변화가 너무 미미해서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뒤돌아 보면, 변화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다음 단계로 점프가 일어난다. 마치 수영을 배우다 보면 어느 순간 자유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문제는 그 상황 안에 있을 때는 이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와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이것을 "비연속적인 잠재적 성장"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비연속적인 잠재적 성장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꿈(목표)을 정하되 그 꿈만 바라보는 것은 안된다. 그 꿈이 멀게 느껴질수록 더욱 그렇다. 때론 꿈을 단계별로 나누는 것도 좋을 수 있다. 한 번에 다가갈 수 없으면 잘게 나눠서 단기간에 다가갈 수 있는 목표를 세우면 좋으니깐, 그것은 점프 성장의 각 단계로 보면 될 것이다. 즉, 눈은 바로 앞의 단계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은 오늘 내게 주어진 도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만든 문구가 "가슴을 꿈을 꾸고 눈은 내일을 보고 손은 오늘을 산다"이다. 다소 길지만, 딱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말더듬이 내게 준 가르침이 이것이라면, 내게 준 의무는 '이것을 널리 알려라'이다. 무엇인가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들, 특히 내가 꿈을 포기했던 그 시기, 즉 중, 고등학생들에게 알려라 하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한번 스스로를 믿고 도전해보라는 것, 하나도 변화되지 않는 것 같지만 내 안에서 변화가 축적되고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때론 영혼을 갈아 넣어도 안 되는 것이 있을 수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포기하는 것이나, 조금 도전하다가 '내가 원래 그렇지 뭐'라고 말하면서 포기하거나, 조금만 더 노력하면 달성할 수 있었던 일 아니면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 일을 지금의 성과만을 보고 포기하는 등의 착오를-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범했던 바로 그-범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말 더듬 극복하는 과정에서-실은 말더듬을 극복하고 나서- 깨달은 가르침들은 지금 내 삶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목표를 잘게 나눠서 지금 달성 가능한 것에 집중하고, 아무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아도 내 노력이 축적되고 있다는 것을 믿으며, 꿈을 품되 오늘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고,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과정을 즐기는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려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무엇인가 깨달음을 주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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