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하는 것과 비우지 못하는 것은 동치가 아니다. 저장하는 것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지만 비우지 못하는 건 미련으로 하는 것이니까. 아직도 지우지 못하는 편지가 있다. 너에게 받은 편지다. ‘고양이는 원래 이상해’로 시작하는 편지. 네 편지 속 고양이만큼이나 이상한 너였다.
“고양이띠 알아? 한국의 토끼띠는 베트남에서 고양이띠래.”
99년생 고양이띠. 한국의 십이지신 자리에 낄 수 없어 화난 고양이가 한국의 고양이띠에게 저주를 내린 것이 분명했다. 땅도 바다도, 심지어는 공기마저도 우리를 괴롭혔다.
경쟁에 점철되어 친구라는 개념도 희미해지는 고등학생 때에도,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우리 평생 이렇게 친구로 지내면 좋겠다. 그치?”
“그러게.”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은 게 선한 일이었다.
“안녕? 주말 잘 보냈어?”
“…수민아 아까 뭐랬지?”
너는 내가 아닌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내 인사를 무시했다. 편지를 건네려던 손이 민망해졌다. 처음에는 못 들은 줄 알았다.
“안녕?”
장난스럽게 인사하며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니 너는 인상을 찌푸리며 내 앞을 지나갔다. 너에게 주려던 편지는 갈 곳을 잃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이사하기 위해 짐을 싸다 편지함을 발견했다. 비우지 못한 편지함이었다. 고양이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던 편지함. 오랜만에 자리에 앉아 편지함에 쌓여있는 네 편지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가끔 네가 부러워. 너는 하고 싶은 게 분명하잖아.’
그 문장이 순간 내 머릿속에 꽂힌 건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분명해도 집안을 잘못 타고 나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너는 무엇이든 지원해줄 수 있는 집안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아니, 네 집은 네가 하고 싶은 게 없도록 만들었다.
너는 99년생 고양이띠였고, 나는 빠른 연생 용띠였다. 십이지신이 되지 못한 고양이. 너는 하고 싶은 게 많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았지만 집안에서 요구하는 것이 많았다. 대개 네가 하고 싶은 것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내가 너와 헤어질 즈음의 일을 떠올려본다. 집안에서 나는 내가 피아노 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나는 꾸준히 하고 싶어 했고, 음악실을 빌려 꾸준히 연습하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집안에서 내가 피아노를 배울 수 있게 도와줬다. 딱 그즈음의 일이었다. 만약 내가 레슨 받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메일함도 다시 열어 찾아봤는데 너는 이미 탈퇴하고 사라졌더라. 나는 이제 너를 찾을 수 없다. 영영 자리를 빼앗긴 고양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