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공동개최하는 전시. 세계 각국에서 인도 남부의 불교미술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였다! 머나먼 인도의 스투파를 왜 봐야 하냐면? 바로 우리나라 곳곳에 세워진 탑의 원형이 바로 스투파이기 때문이다. 북방의 불상, 불교문화가 더욱 익숙한 우리들에게 따뜻한 남방의 건강하고 활기찬 조형들이 색다른 자극을 주는 전시이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국중박의 매력, 쉬운 전시해설과 작품을 풍부하게 상상하도록 만드는 미디어와 사운드로 흥미롭게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너무 낯설어서 관심이 안 가는데?' 하는 분들이 있다면, 기원전 2세기~ 기원후 4세기에 걸친 귀한 작품들을 한방에 몰아보면서 지식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에 추천!
가격 : 성인 10,000원 (탕탕평평, 글과 그림의 힘 정가(5,000원) 구매 시 당일 한정 2,000원 할인)
도슨트 : 매일 오전 11시, 오후 3시
사타바하나의 왕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
붓다(기원전 563-483)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시작된 불교는 탄생, 죽음, 환생, 순환과 같은 삶의 고행을 받아들이고 깨우침을 얻고 나면 고통이 영원히 끝나는 ‘열반’에 이른다는 종교다.
석가모니의 고향 북인도에서 기원전 5세기에 시작한 이 불교는 대를 이어 중국, 한국, 일본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번 전시는 인도 남쪽에 위치한 데칸고원의 동쪽의 수많은 유적을 볼 수 있다.
풍요의 항아리, 연꽃과 함사
1부. 신비의 숲
인도 남부는 북부와는 다르게 습하고 따뜻하여 풍요로웠다는데! 그래서 물과 관련된 상징물이 많다.
물이 가득 담긴 풍요의 항아리와 물 위에서 피어나는 연꽃이 바로 그 예인데, 계속해서 뻗어나가는 연꽃 넝쿨은 자연의 무한한 생명력을 나타낸다. 넝쿨 사이의 푸른 연꽃 그리고 그 옆에는 전설 속의 새 ‘함사’가 있다. 이 친구도 물과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풍만한 약샤. 왼쪽의 약샤는 연꽃을 뒤집어 썼고, 그 주위로 동전이 마구마구 쏟아지는데, 이 역시도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풍요의 여신 락슈미
진짜 숲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초록색 전시장과 창살!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자연의 정령 약샤와 약시가 있다. 남성은 약샤(Yaksa), 여성은 약시(Yaksi)라고 불렸는데,인도 특유의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보인다. 이 신들이 새로운 종교인 불교와 어우러지면서 석가를 보필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한다.
*코끼리 모양 : 인도 종교와 문화의 뿌리가 되는 자료 ‘베다’에 나오는 ‘인드라’는 코끼리를 타고 다닌다. 인드라는 비구름을 몰고 오는 번개의 신인데, 모두 생명의 기본이 되는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비가 내리길 바라는 소원이 담긴 무늬이다.
*머리가 5개 달린 뱀 : 나가. 인도 사람들은 약샤를 믿는 것처럼 나가를 믿었다. 나가가 권위를 뜻하는 불자(짐승의 털을 묶어 자루 끝에 매어 달은 도구. 불교에서 스님이 가르침을 전할 때 사용)를 오른손 높이 들고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는 것을 통해 그 앞에 석가모니가 있는 것으로 추정. 나가는 물을 다스리는 신이었지만, 불교를 믿게 되면서 점차 석가모니를 지키는 존재가 되었다. 뒤에서도 계속해서 나가가 나온다.
*키 작은 신 : 가나. 가장 오른쪽 작품에서 왼쪽 아래 가나는 왕이나 부처가 쓰는 햇빛 가리개를 들고 있다. 약샤는 깨달음을 얻어 다음 생에서 부처가 될 존재로 여겨졌다.
여러 나라와 교류했던 마우리아 왕조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은 인도 전역에 불교를 전파한다. 아소카는 힌두교도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군대가 전쟁에서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살육한 만행에 수치심을 느낀 후 불교도가 되었다. 그 후 '경건한 아소카왕'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인도 전역에 병원과 학교를 짓는 등 자선을 베푸는 왕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마우리아 왕조의 수도는 갠지스강 남쪽, 파탈리푸트라였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인물상이나 작은 원반형 돌을 통해 개방적이고 국제 교류가 활발했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파탈리푸트라 장인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원반형 돌은 북쪽으로는 히말라야를 넘어 파키스탄에서, 남쪽으로는 바다 건너 동남아시아에서도 발견된다.
아소카왕은 불교로 개종한 후 부처의 유해를 파내 인도의 모든 지역에 스투파를 만들고 사리를 안치했다. 그리고 스투파 주변에 자신의 뜻을 기록한 높은 돌기둥을 세웠는데, 돌기둥 위에는 거대한 동물 조각이 올려져 있다. 황소, 사자, 코끼리, 말 모두 왕실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큐피트 장식 손잡이,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를 새긴 원판(왼), 날개 달린 사자 기둥장식 (가운데) , 인도 불교사원지를 발굴기념 파리 기메박물관 포스터(오)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왕이 인도 여러 곳에 사자를 남겼을 때는 실제 사자를 그대로 표현했다. 반면 인도인의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한 사자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기둥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나 뿔잔에서 나타나는 사자의 모습은 서아시아 페르시아에서 가져온 것과 비슷하다. 기원전 6세기말에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1세가 인더스강을 차지하면서 인도 북서부지역에 페르시아 문명이 퍼진다.
*석가모니의 설법은 사자의 울부짖음을 뜻하는 '사자후'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처럼 사자는 불교에서 아주 중요한 동물이다. 동물의 왕 사자는 불교를 넘어 서아시아와 그리스 등 다른 문화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진다. 사자를 표현한 작품을 통해 당시 인도가 주변국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도는 기원전부터 홍해를 건너 유럽과 활발히 무역했다. 인도의 풍요로운 자연환경에서 만들어진 향신료는 유럽인들을 사로잡았고, 코끼리의 아름다운 상아 역시 유럽인들이 무척 좋아하는 사치품이었다.
기원전 3세기의 산치대탐.
식민지배의 역사를 보여주는.. 대영박물관 소장의 유산이 굉장히 많았다.
2부. 이야기의 숲
인간의 믿음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피엔스>에서도 호모 사피엔스가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로 만들어내서 믿기 때문에 서로 모르는 사람 수백 명이 힘을 모아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매진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떤 종교든 몇 세기에 걸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믿는다는 것. 그 이야기를 그리고, 만들어내면서도 사회, 경제, 문화에 따라 변화하며 계속해서 이어져오는 것이 신기하다.
옛 인도인들은 생명이 태어나 죽는 삶이 한 번만이 아니라 믿었다. 북인도 히말라야산맥 아래서 태어난 석가모니도 깨달음을 얻은 이번 생 이전에 셀 수 없이 많은 인생을 되풀이하며 공덕을 쌓았다.
기원전 400년 무렵 석가모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석가모니의 시신을 화장하여 얻은 사리를 여덟 개의 스투파에 나누어 모셨다. 그로부터 약 150년 뒤, 석가의 가르침을 따랐던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은 갠지스강 유역의 스투파에서 사리를 꺼내 인도 곳곳에 8만 4천 개의 스투파를 세웠다. 그렇게 석가모니의 사리와 가르침이 인도 남쪽으로 전해지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리함을 옮기는 코끼리, 사리함, 그리고 크리스탈로 만든 스투파 모양 사리함.
코끼리는 힌두교 신 ‘인드라’가 타고 다니던 동물이고, 왕과 귀족처럼 높은 신분의 사람만 탈 수 있었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는 스투파를 장식하던 조각에 새겨진 코끼리.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었을 때, 인도 곳곳에서는 석가의 사리를 모셔가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모였다고 한다. 맨 마지막에 도착한 사람들은 사리가 부족해서 남은 재만 가져갔다고 하는데, 사리가 무척 귀했기 때문에 사리를 담았던 단지, 사리와 함께 담았던 보석도 석가모니의 사리만큼 귀하다고 한다.
피프라와 스투파 출토 사리
기원전 240-200년경
기원전 5세기, 샤카족의 왕자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오랜 수행끌에 깨달음을 얻어 '샤카족의 깨달은 자'라는 뜻의 '샤카무니, 즉 '석가모니라 불린다. 석가모니는 갠지스강 남쪽 쿠시나가라에서 윤회의 굴레를 벗고 열반에 들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왕이나 성자의 장례를 치르듯 그의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사리를 스투파에 묻었다.
스투파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룸비니와 카필라바스투 등 북인도 여덟 곳의 성지에 세웠다. 그로부터 약 150년 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게 된 아소카왕이 인도 전역에 불교를 전하고자 갠지스강 유역의 스투파에서 사리 꺼내 나눈 뒤, 8만 4천 개의 스투파에 다시 모셨다.
전시된 사리는 네팔과 국경을 맞댄 북인도 피프라와 스투파에서 출토된 것이다. 여기에서 발견된 사리 단지 안에서는 유골과 함제 금이나 진주, 꽃 모양으로 만든 보석이 들어 있었다. 이는 아소카왕이 나중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꺼내어 다시 나눌 때 넣은 보석으로, 사리와 똑같이 귀중하게 여겨졌다.
예전에 미술사 배울 때, 사리에도 종류가 있는데 진신사리와 법신사리로 나뉜다고. 진신사리는 진짜 사리고, 법신사리는 사리처럼 여겨지는 귀한 기물 같은 것이라 했다. 그래서 사리함에 경전을 넣기도 하는데, 불국사 석가탑 2층 탑신부 금동사리외함 속에서 발견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751년)' 같은 경우가 있다.
피프라와 스투파 출토 사리 (기원전 240-200년경)
1898 1월 세상에 알려지게 된 피프라와 사리. 피프라와의 영지 관리인이었던 윌리엄 페페가 자신의 영지 내 둔덕을 발굴했고, 마우리아 시대 브라흐미 문자로 '부처의 유골'이라 적힌 사리호가 들어있는 석함을 발견한다. 발굴을 통해 이곳이 석가모니가 성장한 카필라바스투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후 석함과 사리호는 콜카타의 인도박물관에, 사리와 함께 있던 보석 중 모양이 겹치는 331개는 사리를 발견한 페페가 소장하게 되었다.
머리 다섯 달린 뱀 (나가)이 지키는 스투파, 손대고 싶은 스투파
3단 울타리를 쌓아 스투파의 울타리에 새겨진 이야기를 보면서 빙 둘러 가며 참배하기 위해 스투파를 찾는다고 하는데. 옛 인도인들은 손에 동물의 피나 백 단 나무의 향을 묻혀 스투파에 손자국을 남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석가모니에게 백단나무 향을 바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한다.
석가모니의 상징을 담은 스투파(1세기경)
왼쪽 보리수나무 밑의 빈 대좌, 오른쪽에는 작은 스투파가 하나 더 있다. 이 이작은 스투파 안에는 송곳니 같은 것이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의 치아 사리를 의미한다. 석가모니의 출가부터 깨달음을 얻은 장소, 그리고 그의 사리가 모셔진 스투파까지. 그가 태어나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이르는 이야기를 모두 보여주고 있다.
산치 스투파 스케치
19세기 영국의 인도 고대 불교유적 조사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은 알렉산더 커닝햄이다. 지금처럼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당시에 자세한 스케치를 남겨 기록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전시된 그림은 거닝햄과 함께 산치 스투파 조사에 참여했던 메이지의 스케치 중 일부이다. 그의 스케치는 <나무와 뱀 숭배: 1세기에서 4세기까지 인도 신화와 미술의 도해>, 제임스 퍼거슨의 책에 사용되어 남인도 불교미술 연구의 시작을 알렸다.
산치 스투파 스케치
초기 기독교에서도 예수를 이콘화 했던 것처럼, 불상 없이 석가의 상징만 나타나는 시기를 '무불상 시대'라고 한다. 석가모니를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지 않고 보드가야의 보리수와 빈자리, 법륜을 상징하는 수레바퀴, 발자국(불족적)으로 나타냈다.
보리수 나무 아래 빈 대좌(왼)와 발자국(오)
석가모니는 깨달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몸과 다른 부분이 이 32곳이나 있다. 그의 온몸은 금빛으로 빛나며, 귀는 어깨에 닿고, 두 손은 무릎에 닿을 정도로 길다. 손에는 오리의 발처럼 물갈퀴가 있고, 발바닥에는 가르침을 상징하는 수레바퀴가 새겨져 있다. 수레바퀴는 태양처럼 빛이 난다.
멈추지 않는 수레바퀴처럼 영원히 이어질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법륜'이라고 한다. 법륜과 마카라(인도신화속 바다 생물)(오)
나무 아래의 빈 대좌, 태양처럼 빛나는 수레바퀴, 가지런한 발자국은 인도 전역에서 사용된 석가모니의 상징인데, 불타는 기둥은 남인도에서만 드물게 보이는 상징이다.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는 어깨에서 물, 불을 내뿜은 적이 있다고 한다. 불기둥 주변에 머리가 7개 달린 나가와 연꽃을 든 자연의 정령 약샤 등 남인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신들이 기둥을 향해 경배하고 있다.
석가모니의 인생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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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로 태어난 전생 이야기와 사리 쟁탈전
작품의 오른쪽에는 석가모니가 전생에 염소로 태어난 이야기가 그려있다. 염소인 석가모니가 신에게 제물로 바쳐지려고 한다. 석가모니는 왕에게 살아있는 짐승을 바치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죄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 옆에 말과 코끼리를 탄 사람들이 뒤엉켜 싸우는데, 석가모니의 사리를 갖기 위해 싸우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석가모니가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모두 석가모니의 이야기다.
'자카타'는 석가모니 전생의 이야기, 즉 (본생담)이다. 본생담이라고 하면 뭔가 '지금 생'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한자로 '뿌리본'을 사용한다. 그리고 현생의 이야기는 '불전도'라고 이야기한다.
석가모니의 이야기를 스투파로 장식하는 방법은 한 장면에 여러 사건을 기록하기도 하고, 시간 순서대로 따로따로 배치하는 방법도 있다. 아래는 스투파를 돌면서 보듯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보면 석가모니의 인생 이야기를 순서대로 살펴볼 수 있다.
석가모니의 이번 생 이야기
싯다르타, 머리카락을 자르다
성을 떠난 싯다르타가 숲에 도착해 화려하게 장식된 머리카락을 자른다.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을 널리 알리자 '안드라'를 비롯한 여러 신들이 나타나 싯다르타의 머리장식을 커다란 그릇에 담아 하늘로 옮겨 귀하게 모신다.
싯다르타 왕자가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는 장면이지만,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여전히 활기차게 움직인다. 무언가 포기하는 것이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나가의 보호를 받는 석가모니
깨달음을 얻은 석가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 비가 내리자, 나가왕이 나타나 비를 가려주고 있다. 그 주변에는 석가모니가 일으킨 기적이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스투파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장식하던 조각. 문은 2개의 기둥을 가로지르는 3단의 인방으로 만들어짐.
도리천에 계신 어머니를 만나고 내려오다 , 석가모니의 상
석가가 세상을 떠나 도리천에 계신 어머니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을 전하고 내려오는 모습. 그리고 석가모니의 상은 이 이야기에서 이어진다. 석가모니가 도리천에 있는 동안, 석가모니를 볼 수 없게 된 인도 코삼비의 왕이 참지 못하고 석가모니의 모습을 향나무에 새겼다. 바로 이 나무 조각이 이 세상의 첫 불상이다. 이 불상은 남인도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불상과 같은 모양이다.
이야기를 묘사한 불교미술에서 주인공 석가모니가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불교미술 발전 단계에서 아주 의미 있는 진전이다. 곧 주인공 석가모니는 예배 대상인 불상으로 등장한다.
예배할 때 사용하는 불상은 북인도에서 가장 처음 만들어진다. 하지만 남인도에서도 남인도만의 불상이 만들어졌다. 간다라 불상과 다르게, 우견편단의 얇은 옷, 밝은 표정, 두꺼운 입술의 인도인 얼굴, 소라모양의 낮은 육계(머리 위에 올라온 상투 같은 것)가 특징이다.
기원전후에 남인도에서 아름다운 스투파를 중심으로 불교 사원이 늘어났다. 사원에 스님들이 모여 살면서 건물이 많아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공간이 불상을 모시는 공간으로 변했다. 그리고 점점 돌로 만든 불상을 따라 금속으로 작은 불상이 만들어졌다. 작은 청동상은 사원에서 불상을 물로 씻는 의식에 사용되기도 했다. 또 여행을 떠나는 스님들이 안전하게 다녀오기를 바라며 가지고 가기도 했다. 그렇게 원래의 자리를 떠난 청동상은 멀리 바닷길을 통해 스리랑카, 동남아시아를 거쳐 우리나라까지 오게 되었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는 우리나라를 비롯단 동양 불교 미술의 토대가 된다. 물론 우리는 대승불교, 도가 사상과 융합된 중국 불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전시의 내용이 낯설기도 하겠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들의 마음은 비슷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