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어떻게 볼까?>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아와우치 아리오
-와, 3월. 요즘 정신 없이 퇴근하고 신생아 처럼 잠을 잔다. 조금씩이라도 글을 남겨놓고 싶었는데, 그럴 정신이 들지 않았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전시도 많이 보러다니고 행복했는데… 휴직 기간에 정처 없이 싸돌아다니는 나를 위해 (본인 읽을 시간은 없으니 읽고 재밌는지 알려달라며) 친구가 생일선물로준 책! 생일이 딱 한 달 지난 지금에야 리뷰를 남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대체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어떻게 예술을 본다는 거지? 라며 책을 펼치고, ’본다’는 것은 시각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깨달으며 덮었다. 작품을 눈앞에 두고도, 순간의 인상을 남기겠다며 다시 찾아보지도 않을 사진을 찍느라 바빴던 여러 날이 떠오르면서…...
-어쩌면 나는 전시를 ‘본다’는 행위를 기계적으로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전공했다는 이유로 미술 세계에 끈질기게 질척대고 싶어서, 요즘 경향에 뒤처질까봐 더더욱 전투적으로 돌아다녔나 싶다.
-사실 작품을 볼 때 즐거운 이유는 작품 그 자체가 불러오는 감정뿐 아니라, 함께 간 사람들과 나눴던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너무 오래되어 그동안 잊고 살았던 경험, 혹은 아주 중요하지만 망각했던 것들을 곱씹는 과정이 재밌는 거였는데 말이다. 언제부턴가 작가가 작품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개인적 배경, 시대적 맥락에 더 무게를 두면서 지식과 정보를 쌓기 위해 발버둥 쳤던 것 같다.
-여러 미술관에서 시각장애인들이 작품을 보도록, ‘만질 수 있는 모형’을 설치해 둔 것을 적잖이 목격했다. 시각장애인이 모형의 도움을 통해 동등한 시각적 경험을 하도록 돕는 것. 그것이 그저 전부라 생각 했다. 반면, 책에서 주를 이루고 있는 대화형 감상은 도움을 주는 쪽과 도움을 받는 쪽이라는 관계를 뒤집으면서 우리 내부에 알게 모르게 자리 잡은 차별과 우생사상을 뒤흔든다.
-모두 함께 감상을 시작하며 작품에 관한 간략한 묘사를 거듭하는 것. 참여자들의 해석과 의견을 하나로 간추리지 않는 것. 답이 나오지 않거나 모순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공유하는 아주 자유로운 감상 현장을 읽으며, (누가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나를 옥죄던 ‘~해야만 한다, ~느껴야 한다’는 생각을 휘휘 날렸다. 작품을 보는 우리의 자세는 좀 더 거칠고 정돈되지 않아도 모두 괜찮다고!
-존재 그 차제로 인정받는 이 대화 방식이 엄청난 위안이 됐던 이유는,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사회적 유용함으로 입증되는 능력주의 속에서, 내 쓸모를 끊임 없이 의심하고 찾아 헤매며 피로에 절어있었기 때문이었던 같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될 수 없다.
필사 적으로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상상해도, 우리는 결코 다른 누군가의 인생과 감각까지 체험할 수는 없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사른 사람이 되어볼 필요도 없었다. 괴로움도 기쁨도 모두 그 사람만의 것이다. 그저 다가가는 것.
그리고 이 세계에서 함께 웃어내는 것. "
당장 누군가와 함께 미술관을 찾고 싶어지는 그런 촥촥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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