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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큥드라이브 Jun 28. 2024

<예술은 왜 힘이 셀까?>

마르쿠스 가브리엘 : 예술의 힘

<예술의 힘>


예술은 강력하다. 어느 정도냐면, 인간을 숙주로 삼아 자신을 발현시킨다. 예술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것인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소린가 싶지만.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예술의 힘>에서 예술은 자기 자신을 수행하기 위해 예술가의 정신을 사로잡는다고 이야기한다.


예술이 과연 자율적일까?, 작품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세력에 이용당하는 건 아닐까?, 자본에서도 자유로울까?라는 질문에 '응. 예술의 자율성은 막강해. 그래서 이른바 예술계가 아무리 용을 써도 예술을 지배할 수는 없어'라는 식으로 대답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예술의 존재를 왜 이렇게 높이 사는 걸까? 예로부터 인간의 생각은 인공물들로 발전과 변형을 거듭해 왔다. 우리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힘은 우리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공물'에 해당하는 예술작품은, 아주 급진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


가브리엘은 인간존재가 늘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었다는 사실을 말하며, 여기에 art가 쓰이는 이유도 함께 이야기해 본다. 함께 책을 읽은 친구가 이 부분에서, '인류 문명이 관념의 지배하에 존속해 왔다는 생각에서 인공지능에의 비유가 흥미롭다고 이야기했다. 이어서, 과연 인간은 우리 자신을 '자연적인 natural'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간 부분인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인간은 자연에서 탄생하고 자연의 법칙에 적용을 받으며 진화했으나, 자연적인 '존재'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더 나아가 독서토론 말미에 포스트 휴먼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앞의 이야기와 엮어) 현시점에서 인간의 존재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인공물 그 자체인 인간 또한 급진적 자율성을 띌 수 있다고 보면 너무 논리적 비약일까..


그렇다면 급진적 자율성이란 무엇일까? 한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의미장'을 갖고 있는데 이건 그 작품을 구성하는 레이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의미장들이 해석자 각각에 의해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해석들의 의미장을 끌어온다. 이렇게 다른 의미장들이 함께 모여 '콤퍼지션'을 이루는데, 마치 오케스트라에서 모든 악기들이 조화롭게 음을 내어 음악을 만드는 것 같이 묘사를 한다. 한 예술작품의 콤퍼지션은 다른 예술 작품의 콤퍼지션과 다르기 때문에, 예술작품은 엄청난 자율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예술의 급진적 자율성은 왜 힘이 셀까? 인간의 자율성은 칸트가 말하는 것처럼 보편적 구조에 종속돼 있다. 우리는 개인이라서 자율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의 행위를 보편화하기에 자율적인 것이다. 하지만 예술작품은 논리법칙에 종속되지 않는다. 작품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지만 이것이 예술작품의 존재를 위협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가브리엘에게 예술이란 무엇이며,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나누는 경계는 무엇일까? 이 책에서는 예술을 존재론적으로 다루는 것 같아서(아직 이해를 다 못함.) 미학적인 궁금증이 들었다. 급진적 자율성을 가진 것이기에 장르의 존재까지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미학'이라는 것이 미적경험을 하는 데 쓸모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책의 앞부분에서는 '예술이 도처에 널려있다', 디자인, 패스트푸드점의 간판, 일상생활에 녹아있는 예술까지도 끌어오면서, 54P '예술작품은 해석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은 그것을 지각하거나 그것에 관해 생각한다는 뜻이다. 84P. 인간은 자율적 방식으로 예술작품에 들어가거나 그것을 떠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예술작품으로 빨려 들어갈지 아닐지는 예술작품의 힘에 달려있다. 미적 경험은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는 것. 미적 경험에는 관람자가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은 어떤 작품에 빨려 들어가는가? 빨려 들어가면 작품이고, 그렇지 않으면 작품이 아닌가?, 그렇다면 일상생활 속 예술이 녹아있는 디자인에 빨려 들어가면 그것은 작품인가?  66P 모든 것들이 예술이라는 낭만적 심미주의로 복귀해서도 안된다... 낭만적 사이렌의 유혹에의 저항해야 한다. 이 부분을 보면 모든 것은 예술일 수 없거니와, 심지어 어떤 예술에는 저항을 하기도 해야 한다. 예술의 급진적 자율성 앞에, 인간이 어떻게 저항을 할 수 있다는 걸까?



물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 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이 무척 흥미로웠다. 포스트모던, 상대주의, 구성주의가 가장 지금 시대를 살아갈 때 가장 합리적인(?) 기준점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도끼를 들이밀어준 생각. 아. 우리가 여태까지 알고 있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겠구나. 이게 철학자들이 하는 일이구나. 새삼 깨닫는다.


정말 젊은 나이에 철학의 메카 독일에서 전통을 자랑하는 본대학의 석좌교수로 앉았을뿐더러, 뭔가 감히 손대면 안 될 것 같은 칸트를 비판했다니, 이런 사람이 예술에 관해서 책을 썼다니!!! 기대하면서 읽었지만, 사실 책을 덮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했던 것이 예술이어서 선택하지 않았나. 싶었다.


이 책의 깊이가 어느 정도 일지 사실 상상이 안되는데, 아마도 나는 티스푼으로 흙을 몇 스푼 뜬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서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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