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국공립 미술관을 모두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아마도 약탈한 것이 많아서 그렇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문화예술 향유와 평등한 교육을 실천하기 위함이라고 하니, 살인적인 물가만 제외하면 미술 애호가들이 여러 차례 관람하기 아주 좋은 것 같았다. 그중 테이트 모던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작품을 시대가 아닌 주제별로 엮어 하나의 주제에 다른 작가들은 어떻게 접근했는지 비교하며 감상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특히 터빈 홀에 동시대 작가의 작품을 상징적으로 전시하는 것도 매력 포인트다. 동시대 미술은 사회적 이슈에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주제로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마치 뉴스를 보듯, 중요하지만 우리가 놓친 것들을 다시금 알려준다.
템즈강변에서 바라본 테이트모던
미술관이라고 하기에 뭔가 험상궂게 생긴 이 건물은 원래 2차대전 직후 화력발전소로 사용하다 환경오염 문제로 1981년부터 방치되고 있었다. 그러다 2000년대를 맞아 밀레니엄 프로젝트 일환으로 외부는 그대로 남기고 내부만 뜯어고쳐 미술관으로 사용하여 도시재생 사업의 성공적 사례로도 꼽힌다. 강가를 걷다가 물 흐르듯, 다리를 건너다 자연스럽게 들를 수 있는 접근성이 무엇보다 탐나는 미술관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39m 높이의 거대한 전시장인 터빈 홀은 서양에서는 광장, 우리나라로 치면 마당 같은 역할을 한다. 매년 10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동시대에 가장 유명하고 시의성 있는 작가 한 명을 후원하여 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특히 올해는 한국 이미래 작가님 전시가 이루어져서 기대된다. 현재는, 2019년 영국 터너상 수상자였던 오스카 무리요(Oascar Murillo)의 관객 참여형 작품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와 같은 여행자를 포함하여 다양한 인종과 어린이가 어우러져 신나게 참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오스카 무리요(Oascar Murillo) <The Flooded Garden>
윗층에서 내려다본 터빈홀 전경
오스카 무리요, The flooded garden
전시는 터빈 홀에서부터 과거에 오일 저장소로 쓰였던 ‘사우스 탱크’ 전시실로 연계된다. 공간에 처음 들어서면서 ‘모네가 그린 수련 연작에 짙은 감정이 실린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 생각했다. 멀리서 보면 여러 색상이 조화를 이루면서 수면의 빛을 반사하는 듯한 모습이고, 가까이 들여다보면 두터운 물감의 붓 자국이 켜켜이 쌓여 층을 이룬다. 짧으면서 두께감 있는 터치 하나하나가 힘 있게 느껴져서, 모네의 포근한 느낌과 대조되기도 했다. 가로로 둥근 곡선형의 파노라마가 모네의 수련 연작이 전시된 오랑주리 미술관을 연상케 했다. 작가는 실제로 모네의 수련에 깊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좋은 예술은 오래 살아남아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 같다.
클로드 모네, 수련, 오랑주리미술관 홈페이지
오스카 무리요, Mesmerizing Beauty
이어서 전시장 가운데부터 가장자리까지 플라스틱 의자 위에 나무로 설치된 작은 크기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강렬한 붉은 색이 줄줄 흐르는 물결부터 푸른색, 녹색 계열 등의 잔잔하거나 거친 수면이 일렁인다. 붓 터치 흔적이 여러 방향을 향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잔뜩 표출하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하필 플라스틱 의자였을까?
설치 방법과 재료는 다양했을 텐데 엉성하고 정돈되지 않은 것 같아 의문이 들었다. 전시의 큰 제목인 ‘The Flooded Garden’을 놓고 상상해 보니, 공공의 정원 속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자신만의 물결을 가지고 한군데 모여 큰 물살을 이루며 점차 더 큰 캔버스로 흘러넘치는 것을 표현한 것일까? 이곳에 잠시 머무르는 여행자의 눈으로 천천히 바라본다. 전시장의 풍경이 다양한 인종이 섞여 화음과 불협화음을 내는 복잡한 도시처럼 보였다.
사실 작품엔 작가 나름의 비판 의식이 들어있다. <Mesmerizing Beauty>에서 의자는 지역 사회와 가족의 비공식 모임을 상징한다. 소규모 집단 안에서 우리가 사회의 나머지 부분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여, 우리 사회가 어떻게 눈이 멀고 폐쇄적인지 나타내고자 했다.
콜롬비아에서 태어난 작가는 10살에 아버지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하여 영어 한마디 못 하는 이방인이 된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은 소통 수단으로 작용했고, 예술가로 성장하며 문화적 정체성, 집단적 경험, 글로벌화에 따른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나아가 개인과 사회 집단 간의 긴장된 관계를 소통과 공감으로 이끄는 작업을 진행한다. (2019년 영국의 권위 있는 예술상인 터너상을 받았을 때, 심사위원에게 요청하여 네 명의 후보와 함께 공동 수상을 받은 바도 있다.)
회화, 설치, 비디오, 이벤트 등 매체를 막론하고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작가. 그런 그가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모네의 그림에 끌린 이유는 무엇일까?
모네의 색채 실험은 작가에게 첫 번째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모네가 백내장을 겪으며 시력 상실에도 불구하고 혼을 다해 만든 작품의 아름다움에 빠진다. 그래서 ‘사회적 백내장’이라는 부제를 가진 위의 작품을 제작했다. 1923년, 백내장 제거 수술을 받기 전에 그린 모네의 정원은 백내장이 청색광을 막는 바람에 마치 불길에 휩싸인 듯 보인다.
클로드 모네, 수련 연못, 1899, 런던 네셔널 갤러리(좌) 클로드 모네, The Japanese Footbridge, Giverny, 1922, 미국 휴스턴 미술관(우)
무리요는 모네가 백내장 수술을 받기까지 걸린 10여 년 동안의 지베르니 정원을 ‘고통의 장소’로 상상했다. 고통 속에서 그린 그림에서 아름다움을 찾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다시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사회는 외적 아름다움에 가려진 ‘집단적 근시안’에 눈이 멀어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관점에서 관람객에게 현실을 다르게 바라보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했다.
어쩌면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기준을 시각적 결과물이 아닌 일련의 과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화가의 눈에 비친 순간적 빛의 인상을 포착하기 위해 골몰했던 모네와 닮은 듯 닮지 않았다. 오스카 무리요에게 찰나의 순간은 아마 다양성이 혼종 하여 범람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아름다움은 관람객이 자신의 눈을 가리는 것을 인지하고 시야를 확장하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하며 터빈 홀로 걸어 나왔다.
유니클로 테이트 플레이: 오스카 무리요, The flooded garden
사람들이 모인 곳에 줄을 섰다. <The flooded garden>에 참여하여 트레이 위에 흥건히 짜인 물감을 푹 찍어 영역 표시를 해본다. 누군가의 흔적 위에 계속해서 덧칠하는 행위를 백내장의 혼탁 효과에 비유한 작가의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한다. 거대한 캔버스에 물을 붓듯 참여자의 표식 위에 덧칠하는 행위가 얽히고 덮이고 쌓여 만들어지는 사회 같았다.
오랑주리미술관에서는 모네의 작품을 보며 내면의 명상과 사색에 빠지기 좋았다. 그리고 그에게 영감 받은 동시대 예술가의 작품을 보며 시선을 사회로 돌려본다. 덕지덕지 발린 물감 덩어리가 시각적으로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틀 연속 테이트 모던에 방문하며, 터빈 홀이 점점 푸른 물결로 차오르면서 진화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감상했다. 그래서 함께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지금 나의 시야를 가리는 것은 무엇인지? 잊고 살던 중요한 공동의 가치는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