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아시아 여성으로는 최초 수상이라 그 의미가 더욱 크기도 하다. 특히 <채식주의자>는 사회적 규범을 거부하고 채식주의를 선언하는 한 여성을 통해권력이 억압하는 신체를 묘사한다.
때마침 앞선 메시지와 맞닿아 있는 '접속하는 몸 :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된다. 현대사회에서 개인과 권력, 신체와 자유의 관계를 시각 언어로 감상할 수 있다.'몸'은 미술의 영원한 주제이자 정치적인 장소다. 아름다움, 사회적 지위, 출산, 섹슈얼리티 같은 이슈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아시아 여성 미술가의 작품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술사를 공부하려면 한 번쯤 펼쳐보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400명 이상의 미술가가 언급되지만, 초판본에 여성 미술가는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여성 미술가들은 어디서 뭐 하고 있었을까? 그들은 수 세기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업하거나, 남성의 이름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마저도 성공한 (남성) 화가의 딸, 여자 형제 혹은 아내이다.
1960년대 후반 서양의 페미니즘 물결을 타고 여성 미술가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여성의 신체, 정체성, 사회적 지위에 대한 논의를 담은 작품은 아시아에서도 지역의 맥락을 반영하며 나타난다. 이불, 쿠사마 야요이 등 이번 전시에 포함된 작가들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미술 플랫폼 Artsy의 보고서에 따르면 여전히 서양 백인 작가가 미술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그 자체로 의미 있다. ‘동양 여성’ 하면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와 전혀 다른 130여 점의 작품은 정체성, 신체, 권력, 성적 경계와 같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삶을 안무하라’, ‘섹슈얼리티의 유연한 영토’, ‘신체.(여)신, 우주론’, ‘거리 퍼포먼스’, ‘반복의 몸짓 -신체.사물.언어’, ‘되기로서의 몸- 접속하는 몸’ 총 6파트로 구성된다.
여성 미술가가 사회 구조에 맞서는 방법?
전시는 잊힌 여성의 존재를 사진으로 소환하는 박영숙 작가의 작품부터 시작된다. 이어, 전구와 진공관으로 만든 ‘전기 드레스’를 입은 자신을 표현한 타나카 아츠코<지옥의 문>과 같은 화려한 색채와 큰 규모의 작품들이 시선을 사로잡는 가운데 정정엽 작가의 드로잉이 눈에 들어온다.
정정엽, 나의 작업실 변천사 시리즈, 2017
마치 일기를 쓰듯, 종이에 검정 마카로 그린 <나의 작업실 변천사 시리즈>. 1985-2017년에 걸친 작업실 변화 과정과 그 시기에 겪은 진솔한 이야기를 담은 드로잉 연작이다.
‘입김’의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을 위한 작품, 소품 제작 장소로 애용됨. (…) 6개월 준비한 종묘 점거 프로젝은 ‘전주 이씨 종친회’의 무력 행동으로 무산되다.’ - ‘2000년. 부천시 괴안동 세탁소 2층 작업실 4년 차.’
사적인 공간인 ‘작업실’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는 공공의 공간인 ‘거리’로 이어지며, 여성의 신체와 공간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다. 이 작품은 단순히 개인적 기록을 넘어 여성의 이야기가 사회적 장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저항과 한계를 맞닥뜨려야 했는지를 보여준다.
입김,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 2000, 2000년 9월부터 10월에 열린 프로젝트의 기록
이 이야기는 4부 ‘거리 퍼포먼스’에서 한국 여성 미술가 그룹 ‘입김’의 아방궁 점거 프로젝트와도 자연스럽게 연결 지을 수 있다. 권위와 엄숙주의의 상징인 종묘 광장을 축제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퍼포먼스인데, ‘성기 뽁기 따먹기’, ‘성 정체성 혼란 체험'처럼 이름만 들어도 아찔한 프로그램으로 한국 사회의 가부장 구조에 저항한다.
왜 불쾌감이 들까?
‘섹슈얼리티의 유연한 영토’는 예술 작품들이 기존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완전히 뒤엎는 공간이다. 쿠사마 야요이의 그림에는 붉은 점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아그네스 아렐라노의 <풍요의 사체>에서는 거꾸로 매달린 여성의 배를 찢고 아이가 나오며, 장지아 작가는 오줌 결정으로 작품을 만든다. ‘기 빨린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장파, <여성/형상: Mama 연작>, 2023
특히 장파 작가의 <여성/형상: Mama 연작>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악취가 진동할 것 같은 물감의 흐름과 형상의 불완전함은 고의적인 불편함을 불러일으킨다. 곳곳에 여성의 가슴과 다리만을 형상화한 드로잉은 여성의 신체가 어떻게 종족 번식의 도구로 여겨졌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여전히 남아 있는지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내가 느낀 불쾌감은 단순한 시각적 자극 때문일까? 이미래 작가의 <봐라, 나는 사랑에 미쳐 날뛰는 오물의 분수>, 그리고 엔도 마이& 모모세 아야 작가의 영상 작품<사랑의 조건>처럼 성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작품을 마주할 때, 우리는 인간의 욕망과 성적 정체성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갖게 된다. 여성의 성적 욕망을 감추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는 관념으로 작품을 보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결국, 불쾌감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규범과 사회적 틀에서 벗어나는 순간 직설적으로 표현된 욕망을 마주하며 발생한다. 작품에서 느낀 당황스러움과 거부감을 곱씹으며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이 불쾌감은 정말 ‘작품’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 때문일까?
<마음의 생식 능력을 막지 마시오> - 아라마이아니
하얀 천으로 덮인 의자 위에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이 있다. 진짜 피일까? 그리고 알 수 없는 둥근 철사와 가위를 들고 있는 여성 간호사가 사진에 걸려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벽면을 가득 채운 생리대.
작가는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펼친 96년도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부를 ‘여성 신체에 대한 통제’로 받아들이고, 여성 몸의 깊은 곳까지 간섭하려는 국가에 반발한 작품을 제작한다. 여성의 신체와 생식 능력은 오랫동안 남성 중심적 사회와 국가 권력에 의해 억압 당했고, 그 속에서 여성의 몸은 자율성을 잃고 억압의 대상이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바티 커, <그리고 자비로운 자가 잠든 내내>, 2008
‘신체.(여)신, 우주론’에서 ‘여신’의 이미지는 인간, 괴물, 동물, 알 수 없는 유기체가 버무려진 혼성체로 나타난다. 바티 커<그리고 자비로운 자가 잠든 내내> 또한 그중 하나다. 목이 잘린 신체가 한 손에 해골, 다른 손에 찻잔을 들고 있으며, 찻잔에는 치아가 달라붙어 있다. 목에서 피 대신 구리 선이 뿜어져 나오는 이 그로테스크한 형상은 인도 여신 칼리의 형상인 친나마스타의 상징성을 담고 있다. 친나마스타는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여신으로, 파괴와 재생의 상징이다. 이 작품은 그 상징성을 통해 인도 여성이 겪는 억압과 저항을 표현한다. 또한 칼리가 가진 파괴의 힘이 결국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리는 듯하다.
계속해서 백남준의 아내로 더 많이 불렸을 구보타 시게코의 <뒤샹 피아니: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미술가의 옷을 잘라내며 신체를 노출하는 오노 요코의 <Cut Piece>, 허청야오의 <내 상대로서 마르셀 뒤샹과 함께> 등은 비디오와 퍼포먼스를 통해 서구 남성 중심 미술사에 도전장을 내민다.
‘접속하는 몸’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마지막 섹션 ‘되기로서의 몸- 접속하는 몸’에서는 사이보그, 몬스터, 심지어 시체까지 등장하며, 기술과 예술이 상호작용하는 극단적 형태를 보여준다. 아라야 라스잠리안숙의 <수업>은 비활성화된 생명체와의 소통을 시도하며, 새로운 차원의 접속을 제안한다. 이 모든 작업은 우리가 그들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열린 마음으로 귀와 눈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걸까.
이불, 〈아마릴리스〉,1999
식물의 줄기 같기도 하고, 로봇의 부품 같기도 한 이불 작가의 <아마릴리스>는 성별, 계급의 경계가 사라진 사이보그를 떠올리게 한다. 기계, 식물, 동물 등으로 보이는 이 복합적인 유기체는 성 이분법을 넘어서 인간, 기술, 예술의 상호작용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생각해 보면, 과학 기술의 발달은 성 역할의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인간은 언제나 자연과 기술을 자신의 밖에 있는 타자로 바라보았지만, 이불의 작품은 그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그녀의 <아마릴리스>는 마치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생명체를 보여주는 것처럼 낯설고도 매혹적이다. 기계와 자연이 기괴하게 뒤섞인 이 존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처음에는 불편함이 스친다. 익숙하지 않은 이 생명체는 기존의 인간 중심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불의 작품은 인간, 기술, 자연의 경계를 허물며,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 생명체는 단순히 기계나 식물의 혼합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고정된 틀로만 보았던 성, 인종, 계급의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가능성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아마릴리스>는 자연과 기계, 그리고 그 사이의 어떤 존재로서 우리에게 신체와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권유한다.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을까?
빈지노의 노래 가사에도 나오는 ‘살바도르 달리, 반 고흐, 피카소’는 창조성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반 고흐의 삶과 예술에 자연스럽게 친숙해졌고, 그의 고통과 혼란에 공감한다. 익숙함에 친숙해지는 동안, 상대적으로 아시아 여성 화가들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는 많지 않았던것 같다.
'정체성과 주체성'은 예술가에게 끊임없는 탐구 주제이다. 태어난 장소나 속한 문화에 따라 형성되고 다양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의해 변화한다. 20세기 아시아 국가 대부분은 식민 지배와 전쟁을 겪었으며, 이후 이데올로기, 냉전, 독재, 자본주의 등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 속에서 여성들은 ‘가부장’, 남성 우월주의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접속하는 몸’에서 아시아 여성의 신체가 맥락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저항하는지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로써 자신의 신체와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사회적 경계를 허무는 예술적 실천이 새로운 가능성임을 제시하고 있다. 아시아 여성 화가들이 작품을 통해 던지는 새로운 가능성은 우리의 사고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전시는 2024년 9.3- 2025.3.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5,6전시실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