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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23. 2020

격리가 끝나고 난 뒤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34

4월 22일(격리 38일째) 수요일 맑음


어제까지 며칠 동안 흐리던 하늘이 맑게 개었다. 그날의 날씨에 따라 우리 가족의 동선이 확연하게 달라진다. 해가 나온 날에는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식사도 웬만하면 집 안이 아닌 테라스나 정원에서 한다. 아이들은 방에서 꼬물거리는 레고놀이보다는 정원에서 칼싸움이나 공놀이 같은 걸 하며 논다. 오랜만에 따뜻한 햇볕이 내리쬔 오늘은, 날씨만큼이나 특별한 날이다. 넷째가 오늘로 한 살이 됐다. 아침 식사 때 넷째를 위해 축하카드를 만들어 온 첫째는 오전 내내 생일용 초콜릿 케이크를 만드느라 시간을 보냈다. 


점심을 먹은 뒤 첫째가 만든 초콜릿 케이크에 초 하나를 꼽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첫돌인 만큼 돌잡이도 했다. 넷째는 쌀과 만년필과 지폐와 실뭉치 가운데 실을 선택했다. 실을 고른 것은 넷째가 유일했다. 넷째와 보낸 일 년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 진짜 마지막 아이라는 생각에서인지 약간은 특별하게 대해지는 게 사실이었다. 1~3번 아이들에게 미안하지만, 아내와 내가 넷째를 보며 왜 얘는 이렇게 귀엽지? 라는 식의 대화를 나눈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대화의 끝은 항상 그러니까 5남매의 막내인 너는 얼마나 귀여움을 받았겠냐, 라는 아내의 멘트다. 


지난 일 년 동안 넷째는 큰 탈없이 건강하게 자랐다. 운이 좋아 6개월이던 지난해 10월부터는 일주일에 4일 유아원에도 가게 됐다. 보육교사들이 까다롭지 않은 아이라며 좋아해 준다. 넷째가 유아원에 가면서 우리 부부에게는 약간의 자유를 얻었고, 넷째는 콧물을 얻었다. 단체 생활을 하면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닥치면 언짢은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넷째는 이가 8개 났고, 이제 겨우 네발로 걸을 수 있게 됐으며, 지지대가 있으면 가끔 두발로 서기도 한다. 낮잠이 약간 줄긴 했어도 여전히 잠은 충분히 잔다. 격리 생활 전과 크게 달라진 점은 부쩍 소리를 많이 낸다는 것이다. 가끔은 셋째보다 더 시끄러울 때도 있다. 셋째와 넷째가 동시에 입을 벌리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넷째는 앞으로 두 발로 걷고, 콧물을 혼자 풀고, 의미 있는 말을 하고, 우리와 같은 식사를 하게 될 것이다. 지금처럼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꼭 넷째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 우리는 일탈을 시도했다. 갇혀 지낸 지 거의 40일 만에 가족 나들이를 나선 것이다. 아이들은 내가 장 보러 갈 때 가끔 따라 나온 적이 있는데 아내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게 격리 이후 처음이었다. 그래 봐야 집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친하게 지내는 집의 엄마들끼리 통화를 하다가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됐다. 아내는 그 집 엄마와 친하고, 큰 딸들은 서로 절친에다 같은 반이다. 를롱네는 루아르 강변에 사는데 주 출입문은 대로변이지만 반대편 강 쪽으로 쪽문이 있어서 강변산책로와 곧바로 통한다. 를롱네는 주택가에서 강물까지의 공간에 형성된 풀밭지대를 넓은 정원처럼 이용하며 지낸다. 강변산책로가 관통하는 그 풀밭지대 어딘가에는 를롱네 아이들이 만들어놓은 아지트도 있다. 


차를 강변산책로 입구 근처에 주차하고 산책로로 내려가 걷다가 그 집으로 가서 간식 시간을 함께 보내고 오는 것, 이 오늘의 미션이었다. 아내는 너무 먼 것 아닌가? 도중에 잡히면 어떻게 하지? 라면서 불안해했다. 불안해할 거면 약속을 하지 말든가, 약속을 했으면 그냥 가든가, 하자고 말해줬다. 법규 위반이지만 좋은 날씨에 나들이를 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시민들에게 충분한 양의 정보를 친절하게 제공하지 않는 프랑스 정부에 복수한다는 생각으로 코로나 수칙을 살짝 위반하기로 했다. 하필이면 어제 우리만 지나치게 격리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매일 집 근처에서만 산책을 하니 식상해서 루아르 강변을 따라 걷고 싶어서요, 라고 경찰 단속에 걸렸을 경우 변명을 하자고 입을 맞췄다. 하지만 격리 이후 그렇게 자주 장을 보러 갔어도 단속하는 걸 내 눈으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안심을 시켜도 우리 집에서 를롱네까지 가는 4분 내내 아내의 불안을 잠재울 수 없었다. 정말 최악의 경우 벌금 135 유로다, 라고 말하자 그렇네, 하며 좀 안심하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어기게 될 수칙은 크게 두 가지였다. 집에서 1킬로미터를 벗어나는 것과 1시간 이상 집 외의 장소에서 야외활동을 하는 것. 그 밖에 너무 당연해서 예외조항에 없는 것이지만 두 집의 아이들이 엉켜서 놀며 사회적 거리를 무너트릴 거라는 건 자명했다. 다만 우리는 만나고 헤어질 때 예전처럼 볼뽀뽀를 하지 않는 것으로 최소한의 시민정신을 발휘했다. 


교사인 를롱네 엄마가 이번 부활절 방학이 끝나면 아내와 같은 학교로 복직해서 함께 근무하게 돼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드디어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첫째와 콩스탕스는 몇 달만에 훈련소 면회장에서 만난 친구들처럼 꼭 붙어서 대화를 나눴다.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를롱네 2~4번과 우리 집 2~3번 총 5명은 집 마당과 산책로의 풀밭지대를 오가면서 전쟁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집에 올 때 확인해보니 둘째와 셋째의 티셔츠에 땀이 흥건했다. 를롱네 5번과 우리 4번은 어른들이 있는 집 마당에서 놀았다. 코로나를 잊게 만드는 티타임다운 티타임이었다. 우리의 일탈은 총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됐다. 


하지만 그 시간이 예전처럼 평온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를롱네 집에 있으면서 우리는 옆집에 우리가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조심을 했는데, 예를 들면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도록 저지했다. 를롱네 아이들 이름이 아닌 이름을 아이들끼리 부른다는 것은 방문객이 있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었다. 또 강변 어딘가에서 피크닉을 하던 무리의 사람들을 이웃 누군가가 신고해서 단속을 당했다더라는 소문도 있었다. 아내는 비밀회동 중인 레지스탕스나 조선시대의 천주교도처럼 가슴을 졸이는 것 같았다. 격리가 해제된 5월 11일 이후의 삶이 이런 모습에 가깝게 되는 건 아닌지 당황스러웠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 사회에 남긴 상처는 감염되고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만이 아니었다. 서로 눈치 보고, 서로 의심하고, 서로 감시하는 분위기를 감당하는 건 격리생활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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