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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30. 2020

진짜 심오한 라이벌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40

4월 29일(격리 45일째) 수요일 흐리고 비


100% 한국 문화 속에 아이들을 키워본 적이 없어서, 한국의 아이들은 집에서 뭘 하고 노는지 알 길이 없다. 우리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대충 비슷하겠지, 라고 상상할 뿐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칼싸움은 많이 했으니까, 저 아이들이 자주 하는 칼싸움도 같은 맥락이겠거니 하는 거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내가 동네에서 긴 나무 막대기를 들고 했던 그 칼싸움과는 좀 다르다. 칼이 세련된 모양인 건 물론이고 방패도 필요하다. 방패도 그냥 방패여선 안 되고 중세 기사들의 문양이 들어간 방패 라야 한다. 망토 비슷한 게 있으면 더 폼이 나는 건 당연지사다. 


한국 아이들이 어떻게 노는지는 잘 몰라도, 프랑스 아이들의 사정은 좀 안다. 적어도 남자아이들은 십중팔구 중세 기사 칼과 방패, 투구 등을 쓰고 챙, 챙, 챙 하면서 논다. 격리 기간 내내 우리 아이들이 방에서, 계단에서, 거실에서, 정원에서 그러는 것처럼. 블루아에 온 첫 해, 친한 부부네 놀러 갔다가 그 집 아들 장난감 박스에 있던 중세 기사의 칼과 방패를 보고 눈이 번쩍, 하던 셋째를 발견했다. 다음 생일선물로 저것을 사야겠군, 생각을 해뒀다. 첫 해에 칼과 방패를 선물했고, 이듬해에 망토와 크기가 약간 작은 칼을 선물했다. 칼이 두 개가 됐으니 이제 형과 겨루기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아이들이 중세 기사 놀이에 그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그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용맹한 모습, 영웅 같은 행동, 화려한 외모 등에 매료되는 것이다. 역사 시간에 배우는 프랑스의 왕들은 그런 귀족 기사 문화의 정점에 있던 인물이다. 샤를마뉴 대제나 프랑수아 1세 등 이름만 대면 알 듯한 유명한 왕들은 최고의 기사이기도 했다. 이 동네에서 중세 기사 장난감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루아르 강의 고성(古城)들이 중세 프랑스 왕들의 활동 무대가 됐던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절반만 자기네 역사이지만 칼싸움은 완전 자기들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칼만 있고 방패가 없는 둘째는 버린 박스를 이용해서 방패를 만들어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그래, 좋은 생각인데. 크기는 셋째의 방패를 모델 삼아 자르고 디자인은 인터넷에서 골랐다. 프랑스 왕실의 상징인 백합꽃 문양을 노란색 색종이로 오려, 프랑스 왕실의 상징인 진한 남색 바탕에 붙여 넣었다. 바탕인 남색은 아크릴 물감으로 칠하고, 니스칠까지 했더니 반짝반짝 윤이 나는 그럴듯한 방패가 완성됐다. 둘째의 입이 귀에 걸렸다. 


이번엔 셋째가 난리다. 본인이 큰 칼과 새로 만든 방패를 가져야겠다고 주장한다. 항상 이런 식이다. 셋째는 둘째가 자기보다 더 좋아 보이는 것을 갖는 꼴을 못 본다. 둘의 라이벌 관계는 레고와 플레이모빌의 심오함을 넘어선다. 훨씬 현실적이고 즉각적이다. 내가 중재에 나섰다. 나는 셋째에게 더 크고 멋진 방패를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셋째는 둘째와 언제 말다툼을 했냐는 듯 환호성을 지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세 살 정도 터울의 형이나 남동생이 없는 나로서는 둘째와 셋째의 관계가 어떤 건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이해하려고 노력을 해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어서인지 쉽지 않다. 여동생만 하나 있는 아내 역시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내성적이고 여려 보이는 둘째와 외향적이고 강해 보이는 셋째. 둘째는 내성적이지만 지는 것은 싫어해서 셋째가 이기려 들면 어떻게든 셋째에게 보복을 하거나 위협을 가한다. 둘째에게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셋째는 엄마 아빠의 힘을 빌린다. 빽! 하는 소리를 지르면 엄마 아빠는 둘 다 혼낸다. 셋째는 우리가 안 보는 사이에 둘째를 보며 씩, 하고 웃을지 모른다. 우리가 나가면 둘째는 셋째를 쥐어박는다. 둘째가 또 울면서 빽! 소리를 낸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셋째가 혼나고 있을 때는 우리가 안 보는 틈을 타 둘째가 셋째를 향해 메롱, 하며 웃는다. 분노 게이지가 상승한 셋째는 더 크게 울어재낀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셋째가 데시벨로 치면 지하철 소음에 해당하는 100을 넘을 것만 같은 괴성을 밖으로 꺼내지 못하도록 나는 다시 방패 만들기에 돌입했다. 모델을 정하고, 박스를 자르고, 물감을 칠하고, 색종이를 붙이고, 니스를 칠했다. 이왕에 만드는 거 큼지막하게 박스를 잘랐더니 둘째의 방패보다 훨씬 커졌다. 방패 아래에는 셋째 이름의 이니셜도 박았다. 한 시간 정도 몰입해서 방패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는데, 벌써 두 개째 방패를 만드는 걸 보며 아내가 한 마디 했다. 요즘 읽고 있는 그 책 탓에 그렇게 열심히 방패를 만들고 있냐고. 한국에서 보내준 소포 안에 있던 유발 하라리의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을 말하는 것이었다. 전쟁을 업으로 삼았던 중세 기사들의 회고록을 분석한 책인데, 재미있게 읽고 있기는 하지만 꼭 그 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다, 라는 답은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만들기에 몰입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다는 건 본인도 잘 알면서. 


이제 방패가 세 개, 칼이 두 개 있으니 칼만 하나 더 있으면 넷째까지 합세해서 셋이 칼싸움을 할 수 있게 됐다. 넷째가 형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나이가 됐을 때 어떤 관계를 맺게 될지 궁금하다. 2-4번은 여덟 살, 3-4번은 다섯 살 차이다. 셋째는 아직 어려서인지 넷째와 함께 놀아주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 아직도 질투의 대상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뿐이다. 둘째는 넷째와 제법 잘 놀아준다. 여덟 살이면 나와 형의 차이와 같다. 형은 내게 각별한 사랑을 주는 사람이다. 둘째와 넷째만이 아니라, 1~4번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각별한 관계가 될 수는 없는 걸까. 방패 만드느라 하루는 잘 지나갔는데, 어려운 질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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