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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May 06. 2020

출구전략이 필요할 때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46

5월 5일(격리 51일째) 화요일 흐리고 비


때로는 나가는 일이 더 중요한 법이다. 정치인들이 단식을 할 때도 시작은 쉬우나 끝이 어렵다. 대개는 이뤄지기 어려운 조건을 명분으로 달고 단식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비장한 표정으로 조건이 관철되기 전에는 단식을 멈추지 않겠다, 라고 선언한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조건이 관철되는 걸 본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바로 출구전략이다. 이 전략을 잘 짜는 사람을 우리는 정치에 능한 사람이라고들 한다. 격리 해제가 눈앞으로 다가오는 이 마당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출구전략이다.


첫째의 방을 칠하고 남은 페인트와 각종 도구들을 창고에 정리하지 않고 계단 구석에 치워뒀었다. 계단 벽이 갈라지고 지저분해서 다시 칠하면 좋겠다, 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격리가 해제되면 브리콜라쥬에 매달리기 더 어려워질 수 있고, 남은 흰색 페인트가 넉넉하다는 점이 내게 작업복을 입게 만들었다. 능숙한 자세로 페인트칠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날짜를 세어보니 곧 이동 금지령이 풀린다. 격리가 해제된다. 이제 마무리를 할 시간인 것이다. 출구전략은 단식 중인 정치인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라 격리 중인 가장에게도 필요하다.


넷째의 보육원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는 최악의 경우 보육원에 보내지 못할 상황까지도 예상하고 있었는데, 일주일에 3일은 넷째를 시설에 보내도 된다고 했다. 화요일과 목요일, 금요일. 인간이 얼마나 바이러스에 취약한지는 넷째의 사례를 보면 그냥 알 수 있다. 보육원에 갓 들어갔을 때였던 지난해 9월에 뇌막염 예방접종이 예정돼 있었다. 의사가 써준 처방전을 가지고 약국에서 백신을 산 뒤 날짜에 맞춰 의사에게 가면 놓아주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 처방전이 그대로 아이의 건강수첩에서 잠자고 있다. 보육원에 들어간 뒤 매일이 콧물, 기침, 콧물, 기침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주사 맞으러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격리된 뒤로 넷째의 컨디션은 최상을 유지하고 있다. 예방접종을 위한 의사와 약속이 내일로 잡혔다. 넷째 또래의 아이들은 특히 침을 자주 그리고 많은 양을 흘려서인지 같은 반 아이들끼리 아예 바이러스를 공유하면서 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인간이 되는 것이리라.


첫째의 경우 학교에서 급식 관련 정책이 전과 달라졌다고 연락이 오는 바람에 등교 여부를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 첫째는 손이 가장 덜 가는 아이여서 본인만 반대하지 않으면 집에서 혼자 공부를 해도 우리 입장에서는 크게 달라질 게 없다. 첫째의 입장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호하다. “샤를롯과 콩스탕스가 학교 가면 나도 가고, 걔네가 안 가면 나도 안 갈래요.” 단호하지만 독립적이진 않다. 아내는 오후 내내 둘의 엄마들과 통화를 하는 듯했다. 아직 결론을 내리진 않았는데 안 가는 쪽으로 약간 기우는 것 같았다.


뛰어난 통찰로 논쟁적 작품을 쓰는 프랑스 작가 미쉘 우엘베크가 격리 이후 세계에 대해 한 마디 했다. 한 라디오 방송에 공개 편지를 쓴 것인데, 바이러스가 지나간 뒤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고들 하지만 그는 "반대로, 정확히 똑같을 것이다. 바이러스의 발전과정도 놀라우리만치 일반적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의 접촉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는 어떤 돌연변이를 가속화한 것뿐이며, 인간관계의 퇴행이라는 그 도저한 흐름에 훌륭한 이유를 제공한 것이다."라고 썼다. 그리하여 바이러스 이후의 세상은 "약간 더 나빠질 것"이라고 봤다.


우엘베크는 2022년 프랑스 대선에서 이슬람 정당 출신 인사가 이긴다는 내용의 소설 <복종>(2015년)을 출간해 큰 화제를 불렀다. 그 자체로 워낙 문학상을 많이 받은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의 무슬림 대통령’이라는 설정만으로도 충격적이어서 논란이 됐을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치부하기에는 이야기의 전개가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풍자에 능한 작가들이 그렇듯 우엘베크에게도 촌철살인이 있는데, 코로나 사태 이후 처음으로 밝힌 견해가 무척 그로테스크하다. 다만 소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럴듯하다는 게 꺼림칙하게 다가온다. 그의 글을 소개하는 기사의 말미에 써진 문구가 의미심장하다. “비관주의인가, 통찰력인가.”


프랑스 정부의 출구전략은 그런데 그리 썩 매끄러워 보이진 않는다. 5월 11일 개학 등 격리 해제 대책을 놓고 대통령과 총리가 마찰을 빚고 있다는 기사가 연일 나오고 있다. 과학 아카데미는 애당초 9월 새 학기 때까지 학교 문을 닫아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올렸는데, 대통령이 5월 11일로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이다. 아마도 총리는 과학자들의 의견을 수용해야 한다고 보는 쪽이었던 것 같다. 이후로도 국회에서 보고하고 표결에 부치는 문제 등 사사건건 부딪히는 모습이다. 엘리제 측은 불화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늘 흥미로운 설문조사도 나왔다. 주간지 <파리 마치>의 월간 정기 조사인데, 마크롱 대통령의 인기도가 6% 포인트 하락해 40%가 된 반면, 필립 총리는 3% 포인트 올라 46%가 됐다. 이쯤 되면 굳이 사이가 좋다고 항변하는 게 더 이상할 판이다.


우리 가족의 코로나 브레이크 출구전략은 나의 페인트칠로 시작됐다. 천천히 명상하듯 벽의 갈라진 부분을 때우고, 평평하게 고르고, 한 겹 두 겹 페인트를 칠할 것이다. 깨끗해진 벽을 바라보며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흐뭇하겠지. 요즘 날씨가 꿀꿀해서 정원에 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이번 주가 가기 전에 해가 드러나면 바비큐 파티라도 하면서 격리가 끝났음을 축하하는 전략도 구사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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