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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Nov 11. 2024

[연극] 보이첵




연극 :  보이첵

공연장소 : 구로아트벨리 예술극장

공연기간 : 2024년 11월 7일 ~ 2024년 11월 17일

관람시간 : 2023년 11월 9일 오후 4시




    만약 초대권이 아니라 직접 입장권을 사서 이 연극을 보러 온 사람이라면 분명 저 포스터에 홀렸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희곡 '보이첵'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도 나 역시 포스터에 이끌려 연극을 보러 갔다. 그리고 연극의 도입부에서 하나의 의자가 해체되고 다시 조립되는 걸 보면서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곧바로 큰 소리로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문제는 '의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아니라, 심지어 '의자는 무엇인가'도 아닌,  '무엇이 의자인가'이다. 의자는 왜 의자인가. 바로 상호적인 역할이 의자를 의자이게 한다. 우리는 누군가 앉기 위해 존재하는 사물을, 누군가 앉기 위해 만들어진 사물을 '의자'라고 부른다. 역할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이며 존재의 이유이다. 의자가 의자의 역할을 해야만 그것은 의자인 것이며, 의자가 의자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자가 아닌 것이다. 역할이 의자의 물질과 형태를 결정하고 그 물질과 형태는 전적으로 그 역할에게 협조한다. 그리고 그 사물의 물질과 형태는 정형화된 기호가 되어 우리는 무엇이 의자인지를 안다. 이렇게 우리와 의자의 관계는 지극히 원만하고 협조적이며 평화로운 것이다. 

    아니,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거나 혹은 기만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과도 결코 원만하거나 협조적이거나 평화로울 수 없는데, 역할로 창조되어 물질 속에 충실한 가운데에서도 사물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서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사물은 자신의 기원과 본질에서 미끄러져 나가 간신히 그 끝에 매달린다. 사물이 역할의 그림자인지 역할이 사물의 그림자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저 실존과 본질은 우리의 생각보다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심지어 어쩌면 겹쳐 보일 뿐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감만을 가질 뿐이다. 

     하지만 정작 사물은 자신의 물질과 역할과 본질과 이데아와 정체성과 이름 등등 등 그 모든 것에 무심하다. 그리하여 사물은 언제나 너무 멀며 너무 가깝고 결코 고독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물이 완전한 타자나 완전한 대상은 아니다.  사물도 꿈을 꾼다. 의자인 사물은 의자의 꿈을 꾼다. 사물은 자신의 어딘가에 기억을 간직하고 다. 설사 의자인 자신의 형태와 물질이 산산이 부서져 이상 의자가 아니며 의자였다는 사실조차 알아볼 없게 될지라도 여전히 조각들은 자신이 간직한 기억을 따라 다시 상호성의 세계 안으로, 우리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자신 역시 매일 매 순간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물에게 경외감을 느끼는 것은 사물이 우리와 달라서가 아니라 사물이 모든 것을 견뎌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의자는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연극은 의자를 미치게 하려는 시도이다. 혹은 실은 원래부터 의자가 미쳐있음을 공표하려는 시도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보이첵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나 '보이첵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누가 혹은 무엇이 보이첵인가'를 자문해봐야 한다. 결코 자신의 본질과 원만하거나 협조적이거나 평화로울 수 없었던 보이첵 말이다. 사물이 의자 안에서 진동하듯 그의 실존하는 육체도 보이첵 안에서 진동한다. 그것은 자꾸 고개를 쳐들며 진동을 멈추기 위해 뒤척인다. 그러나 그것은 꿈에서 깨는 법을 모른다. 그것은 남자로 살지 않는 법을 모르고, 마리를 사랑하지 않는 법을 모르고, 돈과 조직에 복종하지 않는 법을 모르고, 의사를 믿지 않는 법을 모른다. 그것은 어느 순간 자기 자신에게서 어긋나 자신의 기원과 본질에서 미끄러져 나가지만 완전히 빠져나가지 못하고 간신히 그 끝에 매달린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있는 물방울같이. 그러나 사물은, 인간은, 존재는 계속 매달려있을 수는 없다. 결국 추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우리 모두의 틀림없는 결말이다. 그리하여 개 중에는 참을성 없이 스스로 뛰어내린 자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미쳤다고 한다. 마치 추락하기에 미친 것이 아니라 미쳤기에 추락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실은 모두가 미쳐있음을 모두가 함께 은폐한다.

    그런데 이러한 흥미로운 영감은 연극의 도입부에서 바로 끝이 난다. 그다음부터는 더 이상의 창조력이 고갈된 듯 의자로 부리는 갖가지 묘기와 억지스러운 의미 부여로 연극은 상당히 김이 빠진다. 물론 그게 조형적으로 혹은 미학적으로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일종의 반복과 잔기술 속에서 도입부의 정제된 강렬함은 사라져 버린다. 사실 나는 소위 무용과 연극을 뒤섞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기대치가 높기에 결국 기대치가 낮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무용과 연극은 굳이 구분하는 자체가 유치할 정도로 서로 밀접하긴 하지만 의외로 무대 위에서 성공적으로 구현되는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 무용과 연극의 시너지가 나기는커녕 모자란 무용을 연극으로, 모자란 연극을 무용으로 감추기 위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어서 차라리 하나에 집중하니만 못하기 마련이다개인적으로 만족했던 경우는 ' 네이처 오브 포켓팅'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사실 '네이처 오브 포켓팅'도 연극 장르보다는 무용이나 행위예술 쪽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듯싶다. 거기다 '네이처 오브 포켓팅'에 대사가 거의 없다는 것 역시 주목할만하다. 근본적으로 행위와 언어는 그 접점에서 서로를 배척한다. 행위가 배척한 것이 언어가 되고, 언어가 배척한 것이 행위가 된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 둘의 결합에서 오히려 더 폭발적이고 근원적인 무언가를 기대할 만 하다.  

    연극 '보이첵'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전체적으로 내 기대보다는 상당히 평이했다. 나는 좀 더 의자들이 미치길 바랐다. 좀 더 보이첵들이 미치기를 바랐다. 좀 더 육체들과 언어들이 미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무대라는 보수적인 공간 안에서 그들은 덜 미쳤고 덜 고통스러웠으며 덜 미끄러졌다. 오히려 그들은 지나치게 세련되고 품위가 있었으며 끊임없이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소위 미치지도 않았으면서 미친척 하고 있었다. 나는 별 감흥 없이 보이첵의 살인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광기가 충분히 고조되지 않은 가운데 지레 겁이 나서 엉겁결에 저지른 살인 같았다. 하긴, 어쩌면 보이첵이 저지른 살인의 진정한 의미 역시 정확히 그것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 죽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분신이든 아니면 나 자신이든지 말이다. 마리를 죽인 후에야 비로소 보이첵은 안심하고 미칠 수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실존과 본질의 부드러운 타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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