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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해 Feb 10. 2021

베를린에는 내가 두고 온 미련과 사랑이 있어

18일 만에 귀국한 교환학생 일기


 사실 출국하기 직전까지 독일로 교환학생을 가는 것을 후회했다. 나쁜 습관인 걸 알지만 원래 과거에 미련을 가지는 버릇이 심하고, 갑자기 살고 있는 지역에 코로나가 심해져서 출국을 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개강이 유독 늦는 나라여서, 다른 지역을 갔다면 문제없이 교환 학생 생활을 하고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다행히 파견 취소나 입국 금지 조치가 취해지지는 않았다. 사실은 그게 다행이 아니라 불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3월 4일 무사히 핀에어를 타고 헬싱키를 거쳐 베를린으로 들어왔을 때 모든 게 다 해결된 줄 알았다.


 내가 교환학생을 지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곳은 영어를 배우고 쓰기 좋은 영미권이나, 언어를 배워보고 싶은 프랑스와 스페인이었다. 그럼에도 독일을 고른 건 교환학생 친화적인 인프라와 싼 생활 물가는 둘째 치고, 베를린이라는 도시에 반년간 살아보고 싶어서였다. 교환학생을 준비하면서 베를린에 사는 교환학생이 블로그에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적어도 이 도시에서는, 모든 다양성을 존중하고, 메인과 서브라는 게 존재하지 않으며  무엇도 메인이고 서브이지 않다고 하며 그것이 그가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사랑하는 이유라고 했다. 그 말은 베를린에 온 지 3일째 되던 3월 6일에 멋진 바에 우리를 데려가 준 우크라이나 친구의 입에서도 비슷하게 들었는데, 걔는 세상 어디에도 베를린 같은 도시는 없을 거고 이 도시는 누구에게나 Equal 하다고 했다. 헤테로 백인 남성이 말하는 Equal은 잘 공감 가지 않았고 실제로 코로나 사태가 심해지자마자 하루에도 여러 번 인종차별을 당하면서 역시나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자유와 사랑을 찾아 내가 온 도시,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도시 베를린에 잘 융화되어 살다 가길 소망했다.


 나는 유럽 최고의 다양성 도시라는 베를린에서,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반대하고 퀴어 프렌들리한 멋진 바들을 가고, 힙스터들이 가득한 멋진 카페들을 발견해내고, 편집샵에서 귀엽고 멋진 물건들을 사고 싶었다. 또한, 유럽 최고의 클럽의 도시인만큼 클럽도 한 번쯤 가보고 싶었다. 인권이나 환경 수업을 듣고 여러 나라의 친구들과 각자의 시각으로 논해보고 싶었다. 필름 카메라 샵을 방문해서 카메라를 하나 더 사고 싶었고, 기숙사 근처에서 들을 수 있는 요가 클래스도 찾아놓았다. 그리고 초여름이 된다면 여러 도시를 방문해 각 도시의 퀴어 퍼레이드를 구경하고 싶었다. 현대 미술이 가득한 베를린의 수많은 전시회와 공연장을 모두 다 가보고 싶었다. 그렇게 학교를 다니면서 베를린을 열심히 돌아다니면, 주말이나 방학에는 프랑스 남부, 포르투갈, 런던, 파리, 스페인 등등 다 나열하기에도 힘든 아주 많은 곳을 돌아다닐 생각이었고 운이 좋게 장학금을 받아서 그를 실행에 옮길 자본도 있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는 그 모든 것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는 개강조차도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한다. 코로나에 걸린다면 외국인의 신분으로는 제대로 치료를 받기도 힘들다. 그리고 상황이 더 악화된다면 지금처럼 길에서 한 마디씩 인종차별적 발언을 듣는 것을 넘어 혐오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 서자 한국행 비행기를 끊었다. 내가 도착한 22일부터 모든 유럽발 입국자들이 격리되기 때문에 나 역시 진천에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하고 싶었으나 두고 온 많은 것들이 베를린에 미련으로 남아서, 비행기가 취소되어 차라리 강제로 베를린에 있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장학금을 반환하고, 수강신청을 해서 학교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 막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그렇게 우울하거나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많은 고민을 하고 우울해하면서 생각 정리를 충분히 하고 돌아온 이유도 있겠지만 같은 배에 탄 학교 친구들과 거기서 만난 친구들에게 참 많은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고 함께 고민하고 우울해해 준 사람들 덕분에 지금 내가 괜찮은 것 같다.


 독일어 수업을 앞두고 개강이 연기될 수 있다는 것을 베를린 장벽을 구경하면서 실시간으로 들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돌아가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유럽에서도 바이러스가 무섭게 퍼져가고 있었고, 하루하루가 너무 달라서 혼란스럽고 뭐 하나 결정하기 힘든 시간이었다. 독일어 수업이 개강하자마자 종강했던 날, 우리는 파티를 했다. 파티를 하면서 한 친구가 우리는 앞으로 있을 이런 위기 앞에서도 지금처럼 웃고 술을 마시면서 밝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이상하게 큰 감동과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인 9명 중 2명만이 남기로 확정되고 여러모로 심각한 상황에서도 밖에서 햇살을 받으며 염색하는 친구들이나, 박물관이 닫기 하루 전날 우리에게 미술관과 박물관을 구경시켜 주던 고마운 버디, 같이 있을 장소가 마땅치 않자 기숙사까지 와준 버디들을 생각하면 위기의 상황에서 여러모로 절망적인 선택지만 남을 때, 그럼에도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 하는 해답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귀국하기 하루 전 혼자만의 시간을 잠시나마 가졌다. 찾아 놓은 카페에 가서 책도 읽고 다이어리를 쓰려고 했는데 역시나 외부에서 케이크 몇 개를 내놓고 포장만 가능했다. 그래서 조금 황망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열린 서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서점도 참 가고 싶었는데 못 가봤네, 하면서 외부에서 들어가기를 망설이다가 들어갔다. 내가 가게에 출입하는 것을 직원이 싫어할까 봐 망설이게 되는 것도 한국행을 결심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점의 분위기는 아주 따뜻하고 친절했으며 영어로 된 책도 팔고 있었다. 유리창 밖에서 본 책을 보고 싶다고 직원분께 말씀드리자 같이 밖으로 나가서 유리를 열고 그 책을 꺼내다 주셨다. 그리고 비슷한 카테고리를 추천해주시기도 했다. 그 책과, 엽서 몇 장을 더 집어 들고 계산을 하면서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이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날인데, 이 서점이 너무 마음에 들고 돌아가게 되어 아쉽다고. 그리고 모든 게 다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다고도 덧붙였다. 직원분은 함께 안타까워해 주셨고, 다 괜찮을 거고 행운이 함께 하길 바란다며 책갈피 하나를 주셨다. 나는 내 책장에 곧 자리 잡을, 베를린에서 온 책과 책갈피를 볼 때마다 그 낯선 이의 다정함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고 그 다정함은 나에게 다시 어딘가로 떠나도 괜찮을 것이라는 용기를 줄 것이다. 2주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고, 나는 다시 2주간 집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도시 서울에서, 내가 사랑하는 장소들을 방문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 무료한 나에게 왕왕 안심이 된다.


3월 23일 격리소에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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