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메기>
우리가 만나게 되는 대부분의 영화처럼, 인생에도 기승전결이 명확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인과관계가 흐릿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그 사건들은 이리 튀었다, 저리 튀었다 하면서 숨 가쁘게 전개된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앞둔 어린 삶은 더욱 그렇다. 경험해보지 못한 전 세계적 재난이라는 거대한 불안이 존재하는 현재는 <메기>가 개봉했던 당시보다도 더욱 버거운 듯하다.
이 이야기, 믿을 수 있겠어요?
<메기>는 90년대에나 보였던 너스캡을 착용한 간호사 복장과, 뛰어서 출근카드를 찍는 병원의 모습을 하고선 대담하게 현대를 배경으로 두고 있다. 내내 나레이션을 하던 화자는 영화 시작 30분이 지나서야 메기라는 것이 드러난다. 종잡을 수 없는 사건들이 개별적으로 몽롱하게 떠있는 듯한 비현실적 감각 속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사실 이 이야기는 무엇보다 현실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는 재개발로 원치 않은 이사를 가게 되고, 누군가는 재난보다도 구직난이 우선이 된다. 젊은 여성은 청년으로서 불안정한 주거와 노동의 문제에 시달림은 물론이고, 여성으로서 젠더 기반 폭력들에도 대응해야 한다.
영화의 시작은 엑스레이실에서 일어난 불법 촬영이고, 끝은 믿었던 연인의 데이트 폭력이다. 불법 촬영과 데이트 폭력은 대부분의 피해자가 여성인, 기존 남성 지배적 질서 하에 일어난 범죄들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불법 촬영, 데이트 폭력으로 인해 죽었고, 죽어가고 있다. 비판의 목적이라는 얄팍한 변명으로, 여성들이 당해온 폭력을 포르노적 시각으로 재현해낸 영화들이 너무 많았다. <메기>는 폭력을 다루되 그를 재현해내지는 않는다. 불법 촬영은 엑스레이라는 은유로, 데이트 폭력은 인물의 짧은 대사로 함축된다. 협박의 대상이 되는 여성의 신체와 피해자의 공포를 보여주지 않고도 관객들로 하여금 그 논의에 닿을 수 있게 한다.
윤영의 이야기는 지금껏 중요하지 않다 치부된 젊은 여성 개인의 삶이다. 엑스레이 사진이 자신일 것이라 의심하고 누가 찍었는지는 알 수 없는 채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고민하고, 사랑하는 연인의 알고 싶지 않은 면을 맞닥뜨리기 두려워한다. 하지만 윤영은 거대한 구덩이에 성원과 함께 빠지지 않고, 구덩이에게서 멀어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혼자가 아닌 메기, 경진, 지연의 도움으로.
나는 <메기>라는 영화가 그냥 너무 좋았다. 이유도 없이 마냥 좋았다. 청춘은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그리 불행하지도 않다.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지만 다시 빠져나올 힘도 있다. <메기>는 대상화에서 벗어난 청년의 삶을 비현실적인 도구를 이용해 현실적으로 담아낸다. 나는 그 이상한 위로의 방식이 좋았다. <메기>가 왜 좋은지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조금은 찾은 것 같다.
2020.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