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민지 Dec 18. 2020

핑크색 스웨트 셔츠

낡고 닳고 아무런 향이 나지 않는.

아플 때 가장 예민해지는 건 후각이다. 음식이나 화장품처럼 향이 나는 것들을 멀리 치워놓는다 한들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했던 것들—예를 들면 식기나 수건, 몸에 걸치고 있는 옷가지 등— 에서도 제각기 냄새가 진해져 속이 메슥거린다.

고역인 것은 입에 약을 털어 넣는 순간. 약 냄새도 강하지만 몇 배로 괴로운 것은 물 비린내다. 원효대사의 말이 맞았다. 맑고 신선한 생수에서도 수조에 고인 더러운 물처럼 고약한 맛이 나는 건 마음먹기에 달린 것. 약과 물을 다 삼키기도 전에 구역질이 올라온다. 다 게워내고 싶지만 속이 뒤집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입을 꾹 막는다. 약과 물과 욕지기가 저 밑으로 내려가기까지.

그런 날에 자주 입는 옷이 있다. 보풀이 얼마쯤 일어난, 척 보기에도 낡고 닳은 선홍색의 스웨트 셔츠. 어느 서핑 브랜드의 남성 라인 제품으로, 가슴팍엔 작고 흰 야자수가 그려져 있다. 택을 달고 있던 새것일 때부터 별로 새것 같지 않았다. 선홍색이라고 해도 희미하게 바랜 듯한 색감이었고, 왼쪽 소매에는 거무스름한 이염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나올 때부터 불량이었던 셈이다. 아무리 격식 없는 스웨트 셔츠라지만 그걸 감안해도 폼이라고 안 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정쩡한 데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10여 년 전쯤 뉴욕의 한 패션 홍보 회사의 인턴으로 일할 당시에 받았다.

폴은 그 당시 내 상사이자 쇼룸의 대표였던 사람으로 눈동자가 푸르고, 키가 훌쩍 큰 사내였다.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는 얼굴은 덥수룩하게 기른 고동색 수염으로 가리고 다녔다. — 내가 아는 미국인 남자들은 어려 보이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베이비 페이스’ 같은 말을 칭찬이 아니라 수치로 여길 만큼.—  하여간에 그가 하루는 창고에서 커다란 종이 박스 두 개를 번쩍 들고 오더니 그 자리에 있던 인턴을 불러 모아 마음에 드는 것을 가져가라고 했다. 종이 박스에서 차갑고 눅눅한 냄새가 났던 것도 같다.

핑크색 스웨트 셔츠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멀쩡한 새 제품이었다. 미국 서부 서핑 브랜드의 쨍쨍한 에너지가 깃들어있는. 왜 하필 불량품을 골랐느냐라고 묻는다면 타당한 이유 같은 게 없다. 그 시절의 나는 핑크색 옷이나 소품 같은 건(지금도 거의 없음) 너무 간지럽고, 내게는 통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왜인지 그날은 어딘가 모자란 미운 오리 새끼 같은 그 옷을 쥐고 놓지 못했던 것 같다. 새 옷 특유의 빳빳하고 단단한 기운 같은 건 없었지만 처음 만날 때부터 백 번은 빨고 말린 것처럼 부드러웠다.

아무리 후각이 예민한 날에도 그 옷만큼은 거슬리지 않는다. 내 몸에서 병의 냄새와 약의 냄새가 뒤섞여 진동을 하면, 낡은 스웨트 셔츠의 네크라인을 코끝까지 끌어올려 자라 같은 모습으로 푸석푸석한 얼굴을 반쯤 숨기고 있는다. 하루든 이틀이든. 낮이고 밤이고 코만 킁킁거리면서.

핑크색 옷 속에 숨어 나는 놀랍게도 (낮이고 밤이고) 자고 일어날 때마다 조금씩 낫는다. 컵에서도, 엄마가 깎아준 사과에서도 냄새가 점점 흐려진다. 비실비실한 것 같아도 몸살 기운 같은 건 이틀이면 거의 떨어진다. 욕실로 가서 옷을 훌렁훌렁 벗는다(그때 벗어놓는 핑크색 옷은 정말이지 가련한 허물 같지만) 콸콸 끓는 물로 샤워를 하고, 물기를 닦을 때쯤에는 보송보송한 수건에선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싶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