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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E Aug 27. 2024

대문자 역사를 넘어 소문자 역사로

영화 <레스비아>를 보고

이 작품은 국가나 관에 의해 획일화된 ‘대문자 역사’를 넘어선 ‘소문자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레스보스 섬‘은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의 펜으로 쓰여진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곳이다. 성인이 된 이후, 페미니즘을 접하면서야 나는 ’레스보스 섬‘의 존재를 알게되었다. 더불어 ’레스보스 섬‘이 ’레즈비언‘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나의 미천한 지식은 여기까지였다.


이 작품을 보기 전까지 어쩌면 나에게 ‘레스보스 섬’은 환상속의 공간에 가까웠다. 그러나 <레스비아>라는 작품을 보며, ’레스보스 섬‘은 나에게 이제 형상과 서사를 가진 구체화된 공간으로 다가왔다.


레스보스에서 나고 자랐으며 동시에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감독 젤리 하드지디미트리우는 자신의 내레이션과 수많은 과거의 푸티지, 당사자를 비롯한 주민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감독과 감독의 친구들이 그 시대를 담아낸 푸티지와 그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과거를 생생하게 상상하게 만든다. 모종의 segregation을 통해서 이루어진 한 해변에서의 레즈비언 공동체 문화는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어냈다.


물론 이들의 ‘천국’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지역 주민과의 갈등 속에 ’레스보스 섬‘에서 일군 그들의 ’자유‘는 부침을 겪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스보스 섬‘은 지금까지도 레즈비언들의 성지로 기능하고 있으며, 과거 ’성도착자‘로 여겨지던 이들은 유의미한 ’고객‘이 되어 적지 않은 로컬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고 한다. 본 작품이 진중할 거라고만 생각했던 기대와는 달리, 호쾌한 할머니들의 인터뷰에 지루할 틈 없이 본 작품이었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가 차별을 이겨버리는 점에 마음이 참 복잡해지기도 한 영화였다.


더불어 줌으로 진행된 GV 또한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레스보스 섬‘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사람이자, 여성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더블 레즈비언’이라고 호명하신 감독 님의 이야기는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더불어 수많은 흥미로운 질문들이 오고 갔는데, 이 질문들은 정말 좋은 의미로 ‘여성영화제(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영화를 본 뒤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현대에는 부유한 해외의 레즈비언들이 레스보스 섬에서 폐가가 된 집을 사들이며 로컬들이 레즈비언들에게 더욱 더 우호적인 스탠스를 취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영화에 나오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나의 가설은 이러하다. 애초에 부유한 레즈비언만이 이곳을 여행지로 삼고, 모종의 별장을 사들이는 행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외의 레즈비언들은 자신의 터전에서 자신을 숨기거나, 함께 모여산다 해도 게토화된 공간에서 모여살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교차성에 대한 복잡한 생각이 끼어들게 된다. 같은 레즈비언이라 하여 삶의 양태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자유와 해방은 계급에 따라 달리 주어진다. 가벼운 마음으로 본 작품이지만, 기대보다 더 많은 사유를 할 수 있게 만들어서 좋았던 작품이다. 기회가 된다면 재관람을 하며 이야기들을 곱씹어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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