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삼진그룹영어토익반>을 보고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주인공들의 꿈과 현실을 완연히 대조시킨다. 빛이 가득히 내리쬐는 서울의 한복판, ‘커리어 우먼’으로 보이는 세 명의 여성은 그거리를 걷는다. 그리고 이들은 영어 학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세계화 시대에 발맞추어 영어 학원에 등록한 듯한 세 명의 주인공 자영, 유나, 보람. 이 세 명이 한 명씩 서툰 영어로 자기소개를 마치자, 선생은 이런 문장을 가르친다. “Boys, be ambicious”. 여성들이 가득한 학원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 말은 여성들의 입을 빌려 한 번 더 울려퍼진다. “Boys, be ambicious.”
이어지는 이들의 현실. 세 명의 주인공은 만년 사원이다. 상고를 나와 몇 년째 진급도 하지 못 한 채, 불편한 유니폼을 입고 온갖 잔업을 도맡아 하는 이들. 이들이 영어 학원에 다니는 이유 또한 회사에서 토익 점수를 일정 수준 이상 넘기면 대리로 진급을 시켜주겠다는 제안 때문이었다.
그런 이들의 업무는 ‘잡일’의 연속이다. 이들은 남직원들이 출근하기 전부터 회사에 나와 그들이 남긴 쓰레기를 치우고, 그들의 입맛에 맞추어 커피를 탄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자영은 어제보다 오늘 더 빠르게 커피를 탔음에 만족하지만, 세상에 염세적인 유나는 자영에게 말한다. “뭐 이렇게 열심히 해. 어차피 결혼해서 임신하면 잘릴텐데”. 유나는 이렇게 군소리를 하지만, 이들과 함께 커피를 나른다. 그리고 커피를 나르는 여직원들에서 카메라는 유려하게 움직여 남자 직원들을 비추고,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작품은 각자의 팀에서 일을 하며 사실상 천대를 받는 주인공들을 하나하나 비춘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경력까지 있는 이들 없이는 팀이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이들은 제대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회계부에 있는 보람만이 ‘좋은 어른’을 상사로 두어 그나마 나은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잡일’의 연속인 일상을 살아내던 와중, 자영은 공장의 잔심부름을 나가게 되고, 공장 근처에서 폐수 방류를 목격하게 된다. 그저 하나의 ‘성장담’으로 그칠 것 같았던 이 작품에는 ‘사회 고발물’의 레이어가 하나 덧씌워진다.
모두가 사측에 서서 회사의 치부를 덮으려 하지만, 자영은 이 사건을 그냥 넘기지 못한다. 그리고 모든 일에 함께 하는 유나와 보람도 마찬가지다. 자영이 하는 일엔 유나와 보람이 함께 한다. 이때 이들이 가진 캐릭터성은 장점으로 발현된다. 자영의 오지랖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힘과 이 싸움을 지속해나가는 힘이 되고, 유나의 염세적임은 상황을 현실적으로 바라보며 타개책을 찾는 힘이 되며, 보람의 수리 능력은 사건의 핵심을 파헤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결국 언론에 알려진 페놀 사건. 이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검사가 회사를 찾아온다. 용기를 내 ‘내부 고발’을 시도하는 자영. 그러나 검사에게 돌아오는 말은 담배나 사오라는 말 뿐이다. 그에게도 여성은 ‘잡일’을 하는 존재로만 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 “세상 절대로 안 바뀐다”는 말, 너희들은 “아무도 아니다”라는 말에도 굴복하지 않는 그녀들(복수형)은 세상에 지지 않고 싸워서 이겨낸다.
이 영화의 결론은 해피엔딩이다. 이들은 투쟁에서 싸워서 이겼고, 토익 시험도 성공적으로 치뤄내어 대리로 진급한다. ‘커리어 우먼’을 꿈꾸던 자영의 꿈은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영화를 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은 내가 조금 더 마음이 가는 영화는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영화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여전히 고통이 가득한 세상이다. 현실은 이보다 참혹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어떤 사람들의 노력으로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게 만들고, 내가 그 ‘어떤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