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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한 책생활 Mar 17. 2024

인간 그 자체에 절망하지 않기 위해

서경식 《나의 미국 인문 기행》

《나의 서양 미술 순례》를 시작으로 《나의 이탈리아 인문기행》, 《나의 영국 인문기행》, 《나의 일본미술 순례》 로 알려진 서경식 저자의 유작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을 읽었다.


“나는 스물네 시간을 투쟁에 바치는 모범적인 활동가상에서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다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 좋은 미술 작품과 조우하기를 바라며 떠돌아다니는 일에 나 자신의 생존에 필요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개인적인 건강 문제와 우크라이나 전쟁, 트럼프의 인종 차별을 비롯한 정치 사회적 갈등 속에서도 예술 속에서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찾으려는 저자의 노력이 책 전반을 관통한다. “인간 그 자체에 절망하지 않기 위해.”


지금만큼 서양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았던 시절 예술에 조예가 깊은 저자의 글은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었을 거라 짐작한다. 서양 미술사에 관한 책은 많지만 그가 ‘선한 아메리카’, 나아가 ‘선한 세계’를 믿기 위해 사랑한 예술가들은 특히 관심이 갔다. 에드워드 호퍼는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디에고 리베라, 조지 벨로스, 벤 샨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기도 했고.


고급스러운 일기 같달까. 정치나 여성주의 같은 민감할 수 있는 주제에 대해 내밀한 사유를 따라가는 것도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의 비극적 생애를 다룬 책들을 주로 접해서인지 내 머릿속 리베라의 이미지는 천하의 난봉꾼인데 그의 생각은 달랐다. 심지어 프리다가 트로츠키와 사랑에 빠져 리베라와 헤어졌다는 식으로 옹호해서 조금 당황함. 개인 생애나 정치가로서의 삶은 차치하더라도, 예술가로서의 리베라의 작품들은 놀라웠다. 《인간, 우주의 통치자》 같은 벽화에서는 혁명가 리베라가 꿈꾸던 인류의 미래가 엿보이기도. 실제로 보면 가슴이 웅장해질 것만 같은 작품이다.

재일조선인으로서 디아스포라 기행을 저술하기도 했던 저자의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학자로서의 편안한 삶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안락하지 않은, 그러나 본인이 생각하는 옳음을 선택한다.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일지라도 굳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의미를 찾는 존재가 곧 인간이다. 참 알 수 없고 피곤하지만 그래서 매력적인 것도 인간이겠지.

누구에게나 첫 경험이 있다.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순간. 그 순간이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어린 시절 수학여행으로 갔던 일본 오하라 미술관에서 엘 그레코, 루오의 작품들을 만났고 쉽게 지워질 수 없는 무언가가 몸 안에 새겨졌다고 적는다. 그림과 사랑에 빠진 순간일 것이다. 그 찰나는 자라 근사한 책이 되었다. 특히 오하라 미술관 소장 베르나르 뷔페의 《애너벨의 모습》을 보고는 그녀를 한동안 동경하기도 했다고. 수록된 사진을 보니 실물이 궁금해졌다. 구글링 하면 몇 초 만에 세계의 명화를 두루 보는 시대지만 실제로 마주해야만 그 가치를 알게 되는 그림들이 많다. 설렜던 첫 경험이 언제인가 떠올리다 반가운 소식을 발견했다.


4월 말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베르나르 뷔페 전시가 시작된다는 것. 별 것도 아닌 일에 의미 부여하기 좋아하는 독자는 운명이라며 호들갑스럽게 얼리버드 티켓을 샀다. 절망에 빠질 것 같은 나날들도 무사히 지나갔다. 다가오는 봄에도 좋아하는 것들을 계속 좋아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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