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통나무 과의 낙엽 관목. 꽃이 없이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여 무화과 無花果 라 불린다. 키는 3-5m가량으로 단단하고 매끄러운 나무껍질로 덮인 가지에 넓은 손바닥 모양의 잎들이 무성하게 달린다. 무화과는 키우기 까다로워 관리에 소홀하면 열매를 수확할 수 없다.
무화과는 또한 성경에 나오는 식물 중 유일하게 예수의 저주를 받은 나무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이상하다. 예수가 배가 고픈 채로 한 무화과나무 앞에 다다랐을 때 하필 그 나무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열려 있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예수는 분노하여 ‘너는 평생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저주를 내린다. 열매를 맺기 이른 계절이었는지 관리 소홀 때문인지 모르지만, 예수가 지나갈 때 열매가 없었던 이 나무는 평생 자손을 남기지 못할 운명을 갖게 되었다.
이 기구한 나무가 날 닮았다고 생각하곤 했다. 애초에 이성에게 관심이 가지 않으니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자손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하다. 큰 잎만 무성할 뿐 예쁜 꽃을 피워 치장하는 일에도 무심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다른 존재들은 앞다퉈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꽃들은 서로 자연히 연결되어 이내 열매를 맺었다. 그 열매로부터 새 생명이 잉태되고 자라났다. 그들은 자신의 본능대로 후손을 남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달랐다. 그런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었고, 따라서 자녀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했다. 다만 체념이 거듭될수록 중심부의 어딘가가 말라가는 느낌이었다. 현실에 맞추어 합리화하고 살아왔지만 사실은 체념하고 싶지 않았다. 자녀를 낳아 키우고 싶은 꿈은 오래도록 품어온 바람이었다. 불가능해 보였지만 아직 희망이 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나아갈 용기가 있다면 말이다.
그래. 나는 불쌍한 무화과나무가 아니었다. 혹은 그런 기구한 운명이 주어졌다 해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지난 수년간 많은 일이 있었다. 북유럽으로의 이주, 적응 과정에서의 어려움, 주변 사람들로부터 도움의 손길, 극복과 좌절의 반복, 이방인의 필연이었던 향수병, 스스로 엄마가 될 준비가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 밤이면 엄습해 온 두려움들. 그 끝에서 이제 비로소,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준비가 되었다. 문턱에 들어섰으며 많은 변화가 생길 수 있음을 안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큰 활기를 부여한다. 내 안에 흐르는 생명의 물길을 어느 때보다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나에게 저주이자 동시에 무엇보다 큰 축복이었던 삶이란 것을 후대에 전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기다려온 시간들이 있었다. 기다림은 행복이자 두려움이었다.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시기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시간은 흐르고 한 계절이 또 지나간다. 열매를 맺고 싶다. 단 한 개의 열매라도. 그 열매가 무르익어 툭 떨어지고, 보드랍고 촉촉한 대지에 감싸 안겨 이내 초록의 작은 싹이 움트기 시작할 경이로운 그 순간을 몇 번이나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