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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 Nov 28. 2021

지금은 엄마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 그리고 시간을 아기에게 할애하고 있다. 그것에 대해 불안과 “본질적” 힘듬은 단호히 없다. 불안이라 하면, 오랜만에 뵌 거래처 사장님 말씀이 그렇게 한번 쉬면 편한 게 좋고 안주하다 결국 들어앉게 되는데 얼른 시동 거셔야죠 알고 보니 현모양처 신사임당 이셨네? 엇.. 음.. 나는 그만 둔적이 없는데 잔잔하게는 하고 있는데 말이죠. 성격상 급함이 적고 게으름을 포장한 느긋함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여유 부리다 벼락치기로 어떻게든 끝끝내 해내거나 평소 티 안 나게 조용히 소곤소곤하다 보니 남보기엔 오해를 사는 게 여러모로 많다. 하지만 또 나의 육성 대답은 이랬다. 반농담으로 “요즘 일에 진심이지 않아서요”

일을 프로답게 한다는 게 어떤 걸까. 과연 보이는 게 다일까. 열정을 다 한다는 게 큰소리 내며, 남들의 속력과 반응에 맞추는 게 경쟁이고 이기는 거라면 나는 열정과 능력이 한참 부족한 거다. 각자의 방식과 성향이 있을 테니 유난이라 표현하고 싶지는 않고, 모두가 알아봐 달라듯 내달리면 성장도 같이 올까. 이제 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자신만의 고유의 결과 속도가 있다고. 쉼표를 찍는 것도 결단이며 마침표를 찍는 것은 내일을 위한 더한 도전임을 말이다.

이전과 달라졌다면 이것도 하고 싶고(내 본업도 잘하고 싶고) 누가 무얼 했다면(더 잘할 수 있다며) 저것도 해보고 싶고 스스로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원하는 건지 잠시 슝슝 바람 든 건지 모른 채 죄다 발 담가 보고 그랬다. 한우물 못 파고 다해본 경험은 지루 할 틈 없고 어느 정도 삶에 윤활류처럼 도움은 분명 된다. 그런데 개인의 “사회적”성장과는 크게 직결되진 않더라. (한우물 파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걸까) 사회적 성장 그래프의 가치를 중점을 두는 건 아니지만 무슨 일이던 노력의 보상이 따라오지 못한다면 길게 못 가는 법이니까. 그런데 좋아서 미쳐서 할 수 있는 일은 댓가 없이도 충분히 할 수가 있다. 나이가 들어가며 열정이 이전보다 수 그러 들었다고 인정하기보다 “지금의 나에게 소중한 것을 찾은 것이라 생각한다.”

아기가 사랑스럽고 애틋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스스로 당황할 만큼 이토록 모정이 애끓을 수 없다. 체력적 한계와 힘듬이 한 번씩 바닥을 치곤 올라와 무언의 신호를 보내지만 그것이 우울 또는 희생이라 여겨 본적도 또 여길 수도 없다.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이젠 뒤돌아 볼 수도 옆길로 샐 수도 없고 순응하며 나아갈 수밖에 말이다.

20대일 때는 결혼하는 게 무덤 파는일 처럼 거부감이 있었고 아기를 낳는다는 건 여자로서 생명이 끝난다는 듯 말도 안 되는 모순적 발상들도 했다. 이제 엄마가 되고 보니 내 편의대로 이 상황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닌 거다. 주홍글씨처럼 엄마로서의 모든 면모를 갑자기 풀장착하게 된다. 이 지구에 한 생명을 나타나게 한 이상 나의 구태연한 망상조차 사치인 거다. 무조건 쭉 아름답지만은 않은 험한 세상일 때도 아가가 잘 적응해 이겨내고 꿈을 펼치며 건강한 삶,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고픈 부모 마음이 자동 발동하는 것이다.

부서질 듯 여리고 엄마의 온기와 사랑이 간절한 이때, 한시도 외롭지 않게 지켜주고 안아주고 싶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시기도 그리 길지 않음을 알기에 안아줄 수 있을 때 팔이 부서져라 안아주고 싶다.

어른들이 자식이 뭔지 한탄 섞인 소리를 뱉어낼 때 가슴에 콕 와닿지 않았는데, 절감한다.

너와의 인연은 세상에 나오기 이전부터 탯줄로 이어, 우리 둘만 아는 스토리들로 한번  엮여 그렇게  몸이었으니 얼마나 특별한지. 그러나 아기가 자라 어린이 청소년 성인이 되갈수록 자연스럽게 개인의 주어진 삶을 살아가게 된다.(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보상심리 따윈 미리 거둬 둘께)   아파 낳은 자식도 개인의 영역을 만들며 살아갈  인격체일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오르는  여정 같으나 생각보다 우리네 삶이 길지만은 않다고 느껴진다. 그러니 곁에 있을 ,  안에 자식이라던가,  품에  팔로  안아줄  있을  아기에게 절절히 진심이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다.

소아과나 아기 관련 어디 갈 때 누구 어머니하고 호명할 때마다, 나? 아닌 줄 알고 넋 놓고 있기도 했고도 와 주시는 이모님이 누구 엄마 카톡을 보내오거나 집에서 그리 부르면 한동안 꽤 어색했다. 엄마라고 셀 수 없이 불러 보기만 하던 그 이름, 그 소리를 듣는 지금이 더 좋아질 줄 세상 알았나. 아직 옹알거리는 갓난 아가에게 요즘 엄마 엄마 해보라고 그렇게 나 혼자 떠든다.

이러니 농담이 아니네, 요즘 일에 진심이 절대 아닌 거다. 어쩌다라도 대표님 실장님 하면 그 소리가 거추장스럽고 미안해진다. “지금은 엄마입니다.” (드라마에선 지금은 헤어지는 중이라던데…) 그리고 앞으로도 무엇을 하던 늘 평행선처럼 따라다닐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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