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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noh Oct 19. 2024

켄즈케 왕국을 읽다가

바다를 항해하다가 빠트린 무엇을 위해


살다보면 꼴불견들이 참많다. 아버지에게 포도주를 사 왔던 내 친구에게 새엄마는 너는 우리 아들과 결혼할 수 없다고 했다. 스러웠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꼴불견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 뜻을 모르고 그렇게 취급해버리기도 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 가족보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고, 그 친구에게 엽서도 보냈다.

그런데 난 꼴불견이 되고 말았다.

왜왜, 순수한 우정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을까.

아직도 그 친구는 바다를 항해하다가 잃어버린 그 무엇처럼 그리운 한 켠으로 남아있다.



그냥 다 알 거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이다.

치욕스럽게 왕따를 겪을 때 오히려 전체 앞에서 커밍아웃 하며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용기는 쉽게 따라오지 않는다.


<모르는 척>에서 방관자이던 주인공이 졸업전에  한 아이를 괴롭힌 우리반 전체의 잘못을 알리기 위해  의자 위에 번쩍 올라갔고, 아이들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도 주인공은 자신의 수치심의 일부를 덜어내기 시작했다.

수치심이 뭔지도 모르는 보수적인 사람들은 끊임없이 네 탓이라며 화살을 밖으로 쏘아 버린다.


수치심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바로 잡을 용기를 얻을 텐데,  눈감고 마는 사람들.

그들도 한 때는 누군가를 꼴불견이라 여긴 적이 있을까.


그리고 스스로는 그러지 않으려고 애써 보았을까.




아닌 모르척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 미덕 같아보이긴 해도

때로는

반드시 짚어줄 때가 있어야 한다.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그 누군가를 위해.

축적된 아쉬움은 경험의 미덕으로 자타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


말조차 건네기 싫은 사람으로 남지 말지어다!


켄즈케는 나가사키 원폭으로 약 40년을 무인도에서 살았다. 어느 날 표류된 10대의 소년을 구하고 아들을 삼고자 했지만, 마이클에게는 이미 그리운 가족이 있었다.


놀랍게도 켄즈케가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엄청난  반전을 맞이 했을 텐데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가슴에 묻고 말았다.


독서 중에 문득 콜라보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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