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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조사 설문하러 왔습니다.

18 Aug 2025

by 게으른 곰

2주일 전, 집 우편함에 편지가 도착했다. 뉴질랜드 통계청(Stats NZ)에서 발송된 것으로, 소득 및 지출 조사 대상 가구로 선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국민 소득과 생활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진행되는 것으로, 무작위로 대상을 선정한다. 일단, 이런 일들이 생기면 신경이 쓰인다. 무슨 일인지 찾아야 하고, 내가 준비할게 무엇인지도 알아봐야 한다. 그리고 가장 골칫거리인 영어. 이 모든 과정엔 영어가 필요하다. 나는 왜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았는가. 왜 영어 말하기의 중요성을 몰랐는가.


집에 돌아와 이것저것 검색해 보니, 조사원이 우리 집에 방문해 설문을 진행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전에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을 담당자와 조율해야 한다. 우편물엔 명함이 함께 들어있었고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대면 가능한 시간을 문자로 보내달라고 적혀있었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그림을 그리러 가거나 영어 수업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에 월요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


기다림의 시간이 또다시 찾아왔다. 뉴질랜드는 기다리는 일이 많다. 이것은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길게 느껴지는 것이다. 한국은 여러 가지 방면으로 작업 처리 속도가 빠르다. 기다려야 할 일도 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면 기다리는 시간이 대체적으로 짧다. 나는 한국에서도 소득 및 지출 조사를 해본 적이 없다. 이번 일을 겪기 전엔 이런 설문을 하는지도 몰랐다. 나에겐 아무 정보가 없다. 문자를 보내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5일이 지나도 명함에 적힌 이름, 나타샤에게서 연락이 없다. 영어 수업이 있던 날, 영어 선생님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며 의견을 물었다. 키위인 그녀도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는 않은 눈치다. 그녀는 내가 문자를 보냈으니 그냥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했어. 그러니 그다음은 그쪽에서 무언가를 할 차례야.’


그녀의 말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래. 기다리자.


영어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메일함을 확인하니 뉴질랜드 통계청에 보냈던 메일에 답장이 와있었다. 나는 뉴질랜드 시민이거나 영주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조사 대상에 포함되냐고 물었었다. 이 나라에 살고 있지만 투표권도 없고 복지 혜택이나 의료 혜택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의료 혜택을 받은 이야기를 다음에 풀어보겠다.) 뉴질랜드 정부는 이 설문조사로 국민의 소득과 지출, 건강에 대한 지표를 만들어 앞으로의 정책 방향에 참고할 것이다. 심지어 나는 직업도 없는데! 메일엔 자세한 내용은 조사원이 방문할 예정이니 그와 대화하라는 내용이었다.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이다.


내가 보낸 메일 때문인지, 혹은 연락할 때가 되어서인지, 며칠 후 답장이 왔다. 우리 집 담당 설문자인 나타샤는 18일 월요일 10시에 방문해도 괜찮냐고 물었다. 우리는 그날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우편물이 온 지 거의 2주가 되었을 때다.


0818.jpg 설문 대상 가구로 선정되었다는 안내문


만남을 약속한 뒤로는 편안한 날들이 이어졌다. 작년이었다면 영어 울렁증 때문에 문득문득 생각이 날 때마다 신경이 쓰였겠지만 나는 이제 영어 울렁증이 거의 사라졌다. 영어를 그때보다 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내가 생각했던 나의 영어 실력의 거품이 사라지고 내 진짜 영어 실력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의미에 가깝다. 영어를 듣고 읽고 해석하는 능력이 말을 잘하는 능력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머릿속 넓은 우주의 크기에 비해, 5살 아이만큼의 표현밖에 하지 못하지만 어쩌겠는가.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내 영어는 아주 작은 크기지만, 어제보다는 조금씩 발전하고 있는 중이니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영어 울렁증 극복을 할 수 있게 해 줬다.


드디어 오늘, 그녀가 우리 집에 방문했다.


그녀는 정시에 도착했다. 부슬비가 내리고 있는 중이라 날씨 이야기로 첫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내가 부탁하기도 전에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왔다. 내가 신발 벗는 문화 이야기를 건네니 그녀는 뉴질랜드도 실내에서는 신발을 벗는다고 말했다. 내가 놀라며 되물었다. 왜냐면 내가 만난 그동안의 뉴질랜드 사람 몇 명은 실내에서 신발을 벗지 않았다. 세탁기를 교체하러 온 남자는 묻지도 않고 당연하게 신발을 신고 집에 들어왔었다. 집집마다 문화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키위가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내가 가졌던 선입견이다.

신발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설문을 시작했다.


몇 명과 살고 있고, 한 달에 얼마를 소비하는지, 고기와 채소, 생선을 매일 먹는지, 일을 하는지, 집이 춥다고 느끼는지, 집안 곳곳에 곰팡이가 많은지, 충분히 따뜻하게 지내고 있는지,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지 등 다양한 질문을 했다. 그녀는 내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고 내가 모르는 단어가 있어 되물으면 친절히 답해줬다. 질문과 답이 오가는 시간이 무난하게 흘러갔다. 30여분이 지난 뒤 설문이 끝났다. 내가 준비한 체리와 사과에 손도 안 댄 그녀에게 음료수를 건넸다. 그녀는 감사 인사와 함께 현관문 밖에 벗어둔 신발을 신고 떠났다. 사실 우리 가족은 현관 안에 들어와 신발을 벗는다. 그녀에게도 그렇게 설명해 줄걸. 하지만 빠른 시간 안에 건네야 하는 말이 제 때에 전달되지 못하면 그 말은 생략된다. 영어를 머릿속에서 번역해서 입으로 옮기는 과정이 긴 나는 그런 일이 잦다. 비가 왔는데, 그녀의 신발이 부디 젖지 않았었길 바란다.


나타샤는 우리 집에 초대된(?) 첫 번째 외국인이다. 가전제품 수리나 교환 등을 위해 우리 집을 찾은 사람들은 많았지만 이렇게 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눈 첫 번째 사람이다. 그녀는 내 영어가 충분하다며 설문 내내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려 노력했다. 그녀는 내가 대답할 때마다 오키도키라는 말로 응답했는데, 오키도키를 사용하는 외국인을 처음 봤기 때문에 그 말이 귀엽게 느껴졌다.. 편안한 분위기로 만들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젊고 반짝이는 눈을 가진 나타샤와의 만남은 이렇게 끝났다.


느낀 감정 중 첫 번째는 듣기가 정말 많이 늘었구나. 그리고 두 번째는 영어 울렁증은 정말 사라졌구나.이다. 세 번째는 말하기는 아직도 갈길이 멀구나, 네 번째는 한국에서도 경험하지 않은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하는구나.이다. 다른 나라에서 처음 겪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또 두렵다. 점점 아무렇지 않아 지는 감정이 드는 게 좋다. 서서히 적응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첫해에 느꼈던 막연한 불안은 사라졌다. 나는 정말, 이곳에 점점 적응하고 있다. 스며들고 있다. 앞으로 더 그렇게 되겠지. 그래서 내일이 기대된다.


겨울이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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