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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레야맘 Jun 10. 2023

개도국에 사는 외국인 엄마는 겁쟁이가 된다

용기 내서 도전하란 말을 못 해서 미안해

얼마 전 스페인어 수업에서 읽은 신문기사에 따르면 내가 사는 도시에 있는 공립 병원의 90퍼센트 이상이 사실상 휴원 상태라고 한다. 병원을 가도 의료진이 없거나, 약품이 없어 제대로 진료를 받을 수 없다는 거다. 스페인어 선생님도 팬데믹 이후 상황이 더 안 좋다며 기사 내용이 과장이 아니라고 했다.

개도국 살이의 어려움 중 하나는 병원이 열악하다는 점이다. 선진국에서도 병원 시스템이 우리나라와는 다르거나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 문제로 병원에 가는 것이 쉽지 않은데, 여기서는 더 말할 게 없다. 의료 수준을 믿지도 못하겠고, 병원에 가도 의약품이 열악하다 하니 병원에 가는 게 꺼려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가 이제는 좀 커서인지 병치레가 없어 지금까지는 병원에 갈 일은 없었다는거다.

병원 갈 일이 없어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 아이는 4장이나 되는 동의서를 가져왔다. 캠핑장으로 스쿨트립을 가는데 필요하다고 했다. 아이가 알레르기가 있는지, 복용하는 약이 있는지 등의 기본 건강 정보, 아이의 보험 정보를 기입해야 했고, 위급상황에 가까운 병원에 데려가는 것에 대해 동의해야 했다. 사실 동의서에 서명을 해서 학교에 다시 보낼 때만 해도 낯선 스페인어 어휘들의 공격에 그걸 해석하고 빈칸 채우기에 정신이 없어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또 이런 건 의례적으로 하는 거라 생각해 별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스쿨 트립 전 날 아이 짐을 챙겨주고 있자니 점점 걱정이 되는 게 아닌가. 벌에 쏘이거나 동물에 물리면 어떡하지, 운동 신경도 없는 아이가 무리하게 친구들 따라 하다 다치면 어떡하지, 아이들이 놀 기구들은 정비가 잘 되어 있을까, 도로가 엉망인데 아이들 버스는 괜찮을까... 단체 여행에서 사고 나는 경우가 우리나라에도 많은데 여기는 얼마나 더 많을까 싶고 정말 온갖 걱정에 괜히 아이를 보내기로 했단 후회까지 들었다. 나를 유난스럽다 할지 모르겠지만, 실제 아이 반의 다른 외국인 엄마는 스쿨트립은 아예 보내지 않는다. 처음엔 의아했는데, 어떤 마음 때문인지 이제 이해가 될 것도 같다.

걱정되는 마음에 아이와 짐을 싸며 몇 번이나 강조하며 말했다. "위험해 보이는 게 있으면 안 해도 괜찮아. 친구들이 다 한다고 너도 꼭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걱정되거나 겁이 나는 활동은 못한다고 해. 알겠지?"

스쿨트립 생각에 설레는 아이는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엄마 말이 이상한지 그냥 웃기만 한다. 나도 내가 말해놓고도 좀 민망해서 같이 웃었다. 용기 내서 도전해 보라고 해야 하는 게 맞는 건데.. 다쳐도 괜찮으니 넘어져도 괜찮으니 용기를 내보라고 응원해줘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는 이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절대 다치지 말라고, 안전하게만 놀고 오라고 하는 엄마라니.. 엄마가 걱정이 많고 겁쟁이 같아서, 마음껏 도전하라고 말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여긴 정말 안전이 최우선인 곳인데.

아침에 아이를 보내고 집에 와선 괜히 심란하여 휴대폰만 보고 있다. 걱정되는 마음에 따라간 엄마들이 보내주는 사진을 보며 안도한다. 아이들은 잘 놀고 있다. 다행이다. 엄마는 괜한 걱정을 한다며 타박을 받아도 좋으니 엄마의 걱정이 무색해지게 제발 안전하게만 놀다 와주길 바라고 또 바란다.

개도국에 사는 외국인 엄마는 이렇게 걱정 많은 겁쟁이가 된다.

아이는 잘 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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