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은 요양원으로 통한다.
나와 연결된 소중한 인연들이 요양원이라는 곳, 이 길에서 만나 함께 동행하고 있다.
입사하기 전에 아파서 입원했던 일이 있었다. 바로 옆 침대에 할머님이 계셨는데 자꾸 답답해하시면서 병실 커튼을 모두 열어야 한다고 하시던 분이었다. 그러니 속으로 ‘며칠 후 퇴원이니 조금만 참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할머니를 요양원에 첫 출근한 날 만났다.
생각하지도 못한 요양원에서 일하게 되어서 낯설었는데 그 할머니를 뵙고 반가워서 낯익은 곳에 온 것처럼 긴장감이 50%쯤은 낮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초등생 육아 중(입사 시는 유치원생)이라 집에서 가깝다는 점이 이 직장을 택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그래서 소소한 인연을 직장에서도 만나는 일이 있다. 우리 아이와 같은 학교 학부모가 간호조무사로 입사를 해서 육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또 동네 마트에서 오며 가며 지나쳤던 분이 요양보호사로 입사하셔서 퇴근 후 걷기 운동 메이트가 되었다.
새 어르신이 입소하시는 날이다.
자녀들이 상담하면서 요양원에 입소하는 날까지 이것저것 꼼꼼히 살피고 결정을 하며 신경을 써주기를 당부했다.
당일 어르신을 보니 와상 상태인 1등급 어르신이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입을 다물 수 없어서 ‘아~~ 아~~’하는 소리를 연신 내셨다. 스스로 조절되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그 소리에 무슨 불편함이 담겨 있지 않으시냐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신체에 대한 갖가지 일은 입소 전 상담으로 마무리되니 그날은 이런저런 감정이 뒤엉켜 있는 가족들과의 대화는 서로 간에 생략한다.
“교수님, 저 가요~” 아내 분의 인사는 작아진다.
드시던 약들, 칫솔, 면도리, 라디오 한 개, 단출한 짐을 생활실로 보냈다.
“어르신, 반갑습니다. 사회복지사입니다.” 인사를 드렸다. 이렇게 또 새로운 인연이 시작된다.
대게는 어르신처럼 몸이 불편해지면 병원에 오래 계실 수도 가족에게 가기에도 어려움이 있어 사정들에 맞춰서 적당한 요양원으로 결정하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 아픈 분이 오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걷는 분들, 춤도 출 정도로 활동 가능하신 분들도 계신다.
생활실 어르신들의 하루는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다채롭다. 교수와 정치인처럼 소위 '배우신 분'도 계시지만 글을 못 읽는 분도 계시다. 도시에서 우유 장사를 하시던 분도 계시고, 갯벌에서 논에서 밭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분도 물론 계시다. 그림 잘 그리는 분부터 노래 잘 부르시는 분까지 재주도 다양하며, 깔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할 분과 정반대인 어르신이 생활관이라는 한 공간에서 하루를 보낸다. 미혼인 어르신의 보호자로 누님이 등장하셔서 깜짝 놀랐고, 성업 중인 요양시설의 원장님이 입소하신 날은 더 놀랐다. 저마다의 다채로운 삶,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내가 안 해본 일이 없다'는 말로 인생을 회고하신다는 점. 안 해본 일이 없는 어르신들이 마땅히 별다른 일이 일어나기 어려운 생활관 지붕 아래 모여 하루라는 시간을 또 삶으로 메운다.
그리고 나도 여기에 있다.
그야말로 모든 길은 로마가 아니라 정말이지 요양원으로 통하지 않나 싶다.
그러니 얼마나 다양한 해학이 있을지 상상해 보길 바란다.
어느 날, 해맑게 웃으시고 알이 큰 귀여운 안경을 쓰신 분이 전날 건강하셨는데 밤사이에 조용히 정말 주무시듯 돌아가신 날, 출근 후 처음 헤어짐이었다. 소식을 듣고 생활실에 가보니 너무 곱게 누워계셔서 좋은 꿈 꾸며 주무시는 것 같았다. 입사 후 한 두 달은 업무에 적응하느라 바빴지만 몇 개월이 지난 후에는 죽음이라는 그 길이 이렇게 나한테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에 우울감이 들기도 했었다.
인사할 새도 없는 허망한 것이 인생이다.
‘어제 저녁에 웃으며 인사해 드릴 걸.’
아이러니하게도 죽음 가까이에 있어 삶은 더 소중해진다.
다양한 삶이 인연이 되어 만났다가 언젠가 헤어짐을 받아들이는 과정.
그야말로 유명한 드라마 제목처럼 우리는 지금 헤어지는 중이다.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한 곳, 특별한 곳 같지만 특별할 거 하나 없는 곳이 요양원의 하루하루다.
누구나 마주 해야 하는, 한 번은 가야 하는 길. 그 길 옆에 나는 있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