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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ppein Jun 12. 2020

해외편) 1-5. 1호점 자리=성공 키워드

1장. 다시는 주재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난 1호점이자 플래그십 매장을 찾는 것에 계속 집중했다. 쇼핑몰에서 만나보고 싶다고 하면 몰의 수준이나 규모를 가리지 않고 일단 모두 찾아가서 브랜드 소개에 최선을 다했다. 왜냐하면 지금 만나는 담당자가 이 몰에서 더 이상 일 할 생각이 없어져 다른 몰로 이직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고 더군다나 그 몰이 내가 브랜드를 입점시키고 싶은 몰이라면 생판 처음 보는 사람보다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는 사람과의 대화가 수월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여느 외국 직장 생활 문화와 마찬가지로 한국과 달리 이직이 아주 보편적이고 잦은 노동 시장 구조이기 때문에 이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내가 몰을 돌아다니는 그 와중에도 ‘저 다음 주부터 이 몰에서 일해요.’라는 연락을 종종 받기도 했고 미팅 중에도 후임자를 데리고 나와 소개를 시켜준 후 ‘앞으로 이 분이랑 연락하시면 되고 저는 다른 몰로 옮기는데 옮기고 나면 알려 드릴게요.’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생각으로 미팅을 다니다 보니 유통사 담당자들과의 인맥이 엄청나게 쌓이기 시작했고 거의 대부분의 몰을 직접 가볼 수 있었다. 하지만 1호점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내가 수많은 몰들을 다니고 있지만 그것은 1호점을 찾기 위해서라기 보단 브랜드를 널리 알리고 인맥을 쌓기 위함이었고 1호점이 들어서야 할 구역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곳은 바로 ‘오처드 로드(Orchard Road)’였다.


오처드 로드는 싱가포르의 쇼핑 중심지로서 내로라하는 세계 유명 브랜드들로 이루어진 브랜드 천국 같은 곳이다. 서울에는 강남대로, 뉴욕에는 맨해튼 거리, 상하이에는 신천지가 있는 것처럼 싱가포르에는 오처드 로드가 있다. 오처드 로드는 싱가포르를 방문하는 수많은 외국인들의 필수 방문 코스이기 때문에 매장을 여는 것만으로도 광고 효과가 탁월하고 럭셔리 브랜드들이 우글거리는 이런 곳에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매장을 열었다는 것 자체로 브랜드의 격과 위상이 올라가는 마케팅 효과도 톡톡히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가의 임차료도 마다하지 않고 입점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이다.

나 역시 이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고 가장 빛나는 이 구역에 반드시 1호점 깃발을 꽂아 플래그십 매장을 만들고 싶었다. 하얀 사각형 티슈 중심부에 스포이드를 이용해 색깔 있는 물방울 하나를 떨어뜨리면 티슈 중심부터 서서히 색깔이 물들며 퍼져 나가듯 싱가포르 쇼핑 중심지에 1호점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싶었다. 그리고 기존의 빵집과는 ‘다른 빵집’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외국에 현지인들이 모르는 브랜드를 가지고 들어와 그 나라에서 브랜딩에 성공을 시키는 첫걸음도 1호점의 ‘자리’이고 나아가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 역시 1호점의 ‘자리’이다.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1호점의 자리는 적당한 곳이 아니라 내 브랜드 혹은 내 매장에게 여기가 아니면 안 되는 곳이어야 한다. 그래서 1호점의 자리는 찾기 전엔 많은 시간을 쓰게 하더니 찾고 난 후는 많은 돈을 쓰게 했다.


오처드 로드 구역 안에 있는 쇼핑몰이라고 무조건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 구역 안에서도 내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쇼핑몰이어야 하고 층수와 위치도 마음에 들어야 했다. 그리고 더 까다로운 것은 F&B 영업 허가가 나 있는 자리(싱가포르는 같은 층에 있는 매장이라도 자리마다 허가가 다르게 되어있다. 게다가 빵집은 매장에 오븐이 있어야 해서 배수와 배기 시설이 모두 필요한데 이 시설 설치가 가능한 매장인지 확인도 필요했다. 만약 허가가 되어 있지 않는 매장이지만 자리가 너무 마음에 들어 용도 변경 허가를 진행할 수는 있지만 엄청난 금액과 시간이 들어가기 때문에 아무리 마음에 드는 자리라도 허가가 안된 자리면 포기하는 것이 여러모로 현명했다.) 여야만 하고 사이즈가 최소 60평 이상이어야 했으며 제빵용 오븐의 전력 소비를 감당할 수 있는 전력이 공급되어야 했다. 이런저런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매장을 구하는 것은 사람이 꿈에 그리던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는 것처럼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조건이 까다롭다 보니 에이전시들도 하나씩 지쳐가며 연락이 줄어들었고 매장을 찾지 못하는 나는 본사로부터 매일 놀고 있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본사 사람들은 한국 내 브랜드 위상만 봐왔기 때문에 ‘1호점 그거 찾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 우리 브랜드 입점한다고 하면 서로 주려고 할 텐데 네가 못하는 거 아냐?’라며 쉽게 생각하고 말도 쉽게 내뱉었다. 1호점 확정이 늦어지면서 나는 이런 비난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매일 교육과 연습만 하는 제조팀을 비롯 다섯 명의 주재원 모두가 본사의 쪼임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 하루하루 피가 말랐다. 하루가 지나가며 찾아오는 내일이 두려웠고 시간이 지날수록 원하는 곳에 매장을 얻지 못하고 본사로 끌려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감도 잃어갔다. 싱가포르에 온 지 약 6개월이 지나면서 내가 오처드 로드에 매장을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패배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점포 개발이라는 분야에 경험도 지식도 없는 내가 아닌 국내의 다른 전문가 주재원이 왔으면 금방 해내지 않았을까라는 자괴감도 밀려왔다. 결국 이 상황의 모든 책임과 잘못은 나에게 있는 것 같아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게 패색이 짙어져 가고 있던 와중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일전에 프레젠테이션을 했었던 오처드 로드의 위즈마 쇼핑몰의 담당자 제시였다.


그녀는 나와 다시 한번 만나 얘기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지금까지 다시 한번 만나서 얘기해보자는 케이스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난 기대를 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설마 위즈마 쇼핑몰 같이 대단한 곳에서 입점을 시키려는 게 아니라 다른 일 때문에 보자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혼란과 미궁에 빠지고 있을 때 즈음 제시에게서 다시 한번 전화가 걸려왔다.


“미안해요. 제가 아까 다른 전화가 들어와서 자세한 얘기를 못 드리고 끊었네요. 이번 미팅 때 저번에 저한테 하셨던 프레젠테이션 있죠? 그거 다시 한번 부탁할게요.”


“그걸 다시요? 이미 다 보셨고 자료도 다 드렸지 않았나요?”


난 이 사람들이 갑질처럼 또 날 불러놓고 같은 일을 반복하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아 살짝 불쾌해졌다.


“아, 제가 다시 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저희 사장님이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이번엔 사장님이랑 임원 분들이 참석하는 미팅이니까 잘 부탁드려요. 그분들께서 관심이 많으세요.”


처음이었다. 쇼핑몰의 수장과 경영진들에게 프레젠테이션의 기회가 온 것, 그리고 브랜드에 대한 관심이 사장까지 전해진 것. 이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난 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 프레젠테이션 준비에 전력을 다했다. 반드시 이 쇼핑몰에 1호점을 오픈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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