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나를 싫어해. 난 너를 좋아해.
그 무렵 나는 마음이 많이 아픈 아이였다. 엄마가 죽고 나서 공황장애, 불안장애, 우울증 진단을 받았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천국에 있는 엄마가 들으면 뒤로 나자빠질 일이겠지만 어쩔 수 없다. 하루아침에 엄마가 없어진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오히려 웃으면서 일 열심히 한다고 항공사에서 하는 무슨무슨 캠페인에서 국제선 티켓도 받고 그랬다. 그게 '불쌍한 애'에게 주는 동정심 같은 상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 나아지는 병인 줄 알았는데, 마음의 감기 같은 거라니까 진짜 감기처럼 금방 나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자식들은 숙주가 죽어가던 말던 신경도 안 쓰고 저들끼리 매일매일 뇌내잔치를 벌였다. 잔치는 주로 밤에 열렸다. 숙주가 혼자 남은 시간, 어둠이 찾아오는 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그러면 불쌍한 숙주는 bgm처럼 무한도전을 틀어놓고 침대에 누워 자기 연민에 빠진 채 '엄마'라는 단어를 입에 머금어보곤 했다. 다시는 '엄마'라고 부를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쓰잘데기없이 감상적인 생각에 빠져 쓰잘데기없이 슬퍼했다. 아픈 생각은 하지 않으려 했는데 '아픈 생각 하지 말아야지.' 하는 그 생각마저 아팠다.
엄마의 장례식 이후 8개월을 버텼다. 버틴 건지, 발버둥 치는 새에 여기까지 멱살잡고 끌려온 건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더 이상은 못 버틸 것 같았다. 공항에서 갑자기 공황발작이 왔다거나 쓰러졌다거나 하는 일은 아쉽게도(?) 없었다. 하지만 발작에 대한 두려움, 공황장애의 합병증인 불안과 우울은 차곡차곡 쌓였고 고통에 대한 이자는 복리로 붙었다. 그렇게 나는 개복치로 진화(혹은 퇴화)했다. 개미 손톱만 한 실수에도 태평양만 한 자괴감이 들었다. 예를 들어 보잉 737 기종의 탑승 시작 시간이 출항 30분 전이라고 친다면, 35분 전이라고 착각해서 보딩사인을 받기 위해 5분 일찍 기내로 내려갔다가 사무장님과 아다리가 안 맞는다. 그러면 나는 나의 완벽하지 못함을 자책하며 퇴근하고 잠들기 전까지도 기분이 안 좋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일 끝나고 약속이 있으면 놀면서도 기분이 구린 동시에 내일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제대로 놀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내일의 실수에 대한 자책까지 가불해서 했다. '분명히 내일 내 게이트에 환승객이 있을 거야. 근데 겁나 많은 거지. 심지어 특이 국적이야. 리스트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카운터 줄 빼느라 바빠서 리스트를 못 만들었어. 그래서 선배한테도 혼나고 결국엔 환승객 백도 안 맞고 자기 수하물을 못 받은 환승객한테 컴플레인 레터도 받고 경위서도 쓰고 나는 망하는 거지!' 대충 이런 식이었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자책을 하고 나면 결국에 남는 건 자기 비하와 괴로움이었다. 나를 미워하는 나는 전혀 쿨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정신이 망가져 가는 게 느껴졌고 나는 점점 나약해져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이었던 나는 회사를 그만두기는 싫었다. 전 회사를 그만두고 공항에 들어오기까지 취업 준비 기간이 길었던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엄마가 너무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우리 작은 딸이 인천공항에서 근무하는 땅 승무원*이야!"
(*실제로 이런 말은 없다. 우리 엄마가 지어냈다.)
나는 복귀가 가능한 병가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병가를 내려면 회사에 내 병을 다 까발려야 했다. 안 그래도 계약직 신분인데 공황장애가 있다고 밝히는 게 옳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퇴사는 하기 싫고 병가는 쓰고 싶은데 병명도 밝히기가 싫었다. 이기적인 거 나도 아는데, 이렇게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이 한심해서 눈물도 안 났다.
그리고 그 당시 중국에서는 중국 독감 또는 우한 폐렴이라는 전염병이 돌았다. 21세기에 웬 전염병이냐 싶었지만 사태는 심각했다. 우한시 사람들이 지역 곳곳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중국에선 우한시를 봉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우한에 거주했던 사람이 일본에 입국해 확진 판정을 받으며 일본에도 바이러스가 퍼졌다. 침방울이 안구에 튀었다는 이유만으로 감염이 되었다는 사례도 나왔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공항에도 비상이 걸렸다. 이제껏 발열카메라 앞을 통과하기만 하면 됐던 입국 검역 단계가 대폭 강화되었다. 각 나라에서는 중국인 입국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Place of birth', 'Place of issue'가 우한인 중국 여권은 체크인 대기가 걸렸으며, 최근 2주 이내에 우한 또는 중국에 다녀온 적이 있는 사람은 자국민 제외하고 국적 불문 체크인 금지가 걸리는 나라도 있었다. 체크인 카운터에는 점점 질의문이 늘어났고 게이트에서는 확인해야 할 기내 검역서류가 늘어갔다. 고오급 서비스와 품위를 중시하던 항공사에서조차 마스크를 지급품으로 나눠주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유니폼 이외에 무언가를 몸뚱아리에 걸치라고 나누어 주다니.
그리고 우한 폐렴은 코로나바이러스(COVID-19)라는 이름을 달고 우리나라에까지 상륙했다. 대구에서 확진자가 폭등했다. 사람들은 몇 달 전부터 계획해오던 해외여행을 비싼 수수료를 물면서까지 취소해댔고, '성수기와 극성수기밖에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존재했던 인천공항엔 서서히 여행객들이 줄어갔다. 여행객이 준 만큼 비행기도 줄었다. 하루 전에 픽스되는 비행기 스케줄에 맞춰 오피스에선 다음날 출근 예정인 직원들에게 내일 혹시 연차를 쓰겠냐며 전화를 돌리기 바빴다. 조업료가 줄자 회사에선 직원들에게 무급휴직을 장려했다. 때마침 쉬고는 싶었지만 병명을 밝히면 회사에서 잘릴까 봐 섣불리 병가를 내지 못하던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나는 나보다 더 오랜 기간 근무했던 다른 누구보다 길게 휴가를 냈다. 두 달. 아무 생각 없이 푹 쉬기엔 참 괜찮은 기간이라 생각하며 주저 않고 회사의 재정상황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두 달이 흘렀어도 나는 공항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잡힐 줄을 몰랐고 마스크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비행기도 더 이상 뜨지 않았다. 더 많은 직원들이 반 강제적으로 무급휴직을 신청했다. 제주공항에 파견 근무할 당시 친해졌던 막내 직원들이 계약 만료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우리 회사는 이제껏 본인이 자발적으로 그만둔 경우가 아니고서야 계약 연장을 해주지 않은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자취집을 연장하거나 새로 계약하는 등 계약 연장에 대한 준비를 해온 상태였다. 친구들은 바이러스가 잠잠해지고 회사가 채용이 필요할 시 우선적으로 재채용을 해주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회사를 나간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다.
제주공항을 시작으로 전국 공항에서 근무하는 계약직들이 하나 둘 떠나갔다. 모두들 줄줄이 소시지처럼 잘려나갔다. 그렇게 6개월 간 무급휴직, 유급휴직을 전전하다 우리도 계약 만료 통보 메일을 받았다. 정규직 전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자의로 그만둔 게 아니다 보니 미련이 많이 남았다. 곧 다시 불러줄 줄 알았다. 마치 애인에게 차이고 나서 바보같이 잊지 못하고 다시 연락해주길 바라는 모양새 같았다. 하지만 헛된 기대는 일주일, 한 달을 지나 일 년이 넘었다. 일 할때는 병가를 내서라도 쉬고 싶었는데, 힘들었는데, 진짜 분명 힘들었는데, 이제 더이상 나오지 말라고 하니까 괜히 그게 더 힘든 것 같고 속이 상했다.
아직 항공사에서 월급 타 먹고 있는 분들은 모두 '탈항공'을 했다며 축하해줬지만 그것이 나의 자의적 탈항공이 아니라 타의적이었단 점에선 참 거시기했다. 그렇게 회사에서 잘린 나는 경제적 자유도 잃고 님을 향한 사랑도 잃었지만 적어도 새로운 인생을 살아볼 기회는 얻지 않았나? 하고 강제적 긍정왕이 되어보기도 한다.
사랑했지만 사랑받지 못했음에 대하여, 그저 수많은 부품 중 하나였대도 좋았다며 미련함을 숨기지 못하는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모든 게 덧없음이다. 코로나가 모든걸 집어삼킨 이 시대는 언젠간 끝날 지도, 끝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우리들의 모든것을 앗아가진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