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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복 Jun 18. 2021

불행한 만큼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불행했던, 불행한, 불행할 모두에게 전하는 글

1. 불행의 역사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겪은 가장 큰 불행은 무엇인가? 그 불행을 언제 겪었으며, 그 영향력은 얼마나 오래, 어떤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가?

태초에 불행이라는 관념이 있었다. 이는 카오스의 상태로 서로 엉겨 붙어 있다. 그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불행들이 탄생하고 있고 그로 인해 불행은 꾸준히 팽창하고 있는데, 이 양은 그 내부에서 더는 감당하기가 어려운 수준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불행은 지금의 혼란한 형태나마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불행들이 태어나는 것만큼 기존에 있던 불행들을 내치는 구조를 택했다. 내쳐진 불행들은 본가에서 독립한 불행들이고, 이들은 본가에서 독립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제각기 온전한 단 하나의 불행이 되는 것이 그들의 꿈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그들의 몸을 영영 누일 제 주인이자 집으로, 단 한 명의 사람을 찾아 나선다. 그를 위해 그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불행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상황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자신들도 그러한 성향을 따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영리하고 허영심 넘치는 불행들은 제 주인에게 꼭 맞는 모습으로 그들에게 찾아간다. 그에 매혹되지 않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중에서도 그 이후의 수많은 불행들을 연달아 불러오는 우리 생의 가장 큰 불행이 있다. 그가 처음 내게 다가온 순간, 그가 나와 얼마나 오래 어떤 모습으로 함께 하고 있는지를 난 전부 알고 있다.


2. 불행은 나의 것


성적이 떨어져 원하는 학교에 진학할 수 없다든가, 부모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다든가, 나의 사소한 잘못들이 쌓이고 쌓여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게 됐다든가... 너무도 다양한 모습의 불행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불행 서사를 갖고 있다. 이들은 객관적인 시선에서 견지해봤을 때 분명 경중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중한 물건을 잃었을 때의 슬픔보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의 슬픔이 더욱 크다고 여기는 것처럼.

하지만 과연 객관적인 시선이란 게 실존하는가?

그리고 실존한다고 한들, 내 불행이 어느 정도의 불행인지 인정받기 위해 그 객관적인 시선에게 내 불행의 순간을 낱낱이 밝혀 보여줄 필요가 있는가?

그가 당신의 불행을 두고 '이 정도면 투정 부리지 말아야 할', '이 정도면 자살해도 할 말 없을' 등등의 다양한 평을 내려준다면 당신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 아무리 우리가 저마다의 불행에게 저마다의 모습으로 휘둘리는 삶이라 한들, 명목상으로는 불행의 주인은 우리이며 제 불행의 처분권은 저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느껴도 좋다. 그리고 그 불행을 언제부터 언제까지 끌고 갈지, 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도 오롯이 당신의 몫이다. 분명 그것은 당신의 자유이다. 동시에 권리이기도 하지만, 이이 대해선 차차 얘기하도록 하겠다.

어쨌든 나는 이 책에서 나의 불행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선 직접적으로 소개하지 않겠다. 필요하다면 조금씩 언급하겠지만, 내 불행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분분할 게 분명하고 그 각자의 의견에 대해선 굳이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은 부분이 없다. '이 정도로 힘들다고 징징대는 꼴이라니' 하고 비웃는 사람의 말도, '이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야' 하고 동정하는 사람의 말도 존중하니까, 아니 사실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이 없다. 내가 느끼기에 나의 불행이 내가 어떤 식으로든 휩쓸릴 정도의 힘을 가졌고, 그래서 실제로도 휩쓸린 것이기 때문이다. 난 내가 불행이 끝난 후에 그로 인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얘기할 것이다. 물론 또 새로운, 더 막강한 불행이 내게 찾아올지 모르지만 우선 난 이제껏 내게 있어 가장 큰 불행과 그로 인해 딸려온 대부분의 불행에서 몸을 건져냈다. 아직 몸이 젖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땅 위에 서있다. 그리고 불행의 바닷속에서부터 입안에 머금고 있던 말, 그리고 땅 위로 올라오자마자 못 쉬었던 숨을 내쉬기도 전에 토하듯 내뱉었던 말을 기억한다.


무조건 이제껏 불행했던 만큼 행복해져야 해.


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드디어 얻어낸 평범한 나날들을 그저 불행했던 만큼 행복해지기 위한 과도기일 뿐이라 생각하며 오로지 내가 누려야 할 행복이란 무엇 일지에 대해 골몰했고, 이게 행복인 것 같다 싶으면 거침없이 움켜쥐고 오랫동안 놓지 않았다. 그런 나날들의 반복이었다. 그러면서 행복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3. 실망스러웠던 행복


왜 불행은 이다지도 거창하고 행복은 이리도 초라할까.

평범한 나날들의 연속 그 안에 알알히 박혀있는 소소한 행복들 난 그런 게 우리네 삶의 전부란 것을 믿기 싫었다.

어떻게든 잔뜩 불행했던 만큼 잔뜩 행복해져야겠다고, 그렇게라도 보상받아야겠다고 난 다짐을 했었지.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라엔 법이 있지도 세상엔 법이 없는 것을, 이것은 이치를 운운할 문제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불행에 베여 크게 패인 살갗의 빈자리를 꼭 맞게 날카로운 행복으로 채워야지 생각했는데 현실 속 행복의 모양은 늘 둔탁하고 무른 것이었다. 불행이 병든 것이라면, 행복은 아주 건강한 것이 아니고 그냥 아프지 않은 정도인 것이었다. 불행이 흑백이라면, 행복은 휘황찬란한 원색의 향연이 아니라 그냥 삼원색 정도였다. 하지만 나의 마음엔 고작 그런 행복으론 채워질 수 없는 구멍이 났다고. 난 그저 달이 뜬 것으로, 꽃이 핀 것으로, 날이 좋은 것으로, 네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고작 그런 사소한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단 말이야. 아니 고작 그런 것으로 채워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게 맞을까? 그렇다. 그런 오기가 있었다. 나는 나의 감당할 수 없었던 불행이 그저 운없이 내게 온 것이 아니라 어떤 감당할 수 없는 행복의 전조일 거라고 막연하게 믿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평범한 행복으론 만족할 수 없었고 만족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난 근원적인 문제가 불행이나 행복이 아니고 날카로움이라는 것을 모른 채, 날카로운 행복을 취하기 위한 일탈과 눈속임을 밥 먹듯 하며 살았다. 그로 인해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까지 했는지 앞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질 덧붙이고 싶다. 난 불행에 찌든 사람의 행태를 미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논조를 본격적인 글을 서술하기에 앞서 먼저 밝히게 되어 미안하지만, 난 그를 비판하는 쪽이다. 그저 단순히 그것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보다, 최대한 자세히 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어떤 심리로 일어나는 일이고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결코 큰 수확이 없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이것을 확실히 밝히고 싶다. 그럼, 이 글이 불행했던, 불행한, 불행할 모두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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