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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Nov 25. 2022

진짜 가벼운 백패킹을 하려면

아웃도어는 역시 장비 발


백패킹(Backpacking). 네이버 사전을 검색하면 ‘1박 이상 야영할 짐을 갖추고 떠나는 여행’이라고 나온다. 등산 더하기 캠핑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경험해보니, 이건 또 다른 종목이었다. 배드민턴과 테니스가 다른 것처럼. 모든 레저가 ‘장비 발’이 중요한데 백패킹이야말로 장비에 따라 질이 좌우된다는 걸 경험했다.  


한 번쯤 백패킹을 해보고 싶었지만 막연했다. 장비도 부족하고, 갈 곳도 마땅치 않았고, 같이 갈 사람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경북 안동에서 ‘아트 워크 트레일’이란 백패킹 행사가 있어서 참가했다. 놀러 가는 건 아니었지만 모처럼 설렜다. 이런 취재 오랜만이었다.  

행사 안내문에는 10kg 미만으로 짐을 싸라고 했다. 감이 안 잡혔다. 이틀간 20~30km를 걷고 취침, 취사 장비까지 챙겨야 하는데 10kg으로 가능할까. 밤에는 엄청 춥지 않을까. 마땅한 크기의 배낭이 없었고 내가 가진 텐트는 너무 무거웠던 터라 배낭과 텐트를 빌렸다. 50리터 배낭에 텐트, 침낭, 자충식 매트, 두 끼 식량, 보온 의류 등을 꾹꾹 눌러 담았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드론을 비롯한 촬영 장비가 더해졌고 캠핑 의자도 챙겼다. 가벼운 백패킹을 할 때는 의자를 안 챙긴다지만 의자를 포기할 수 없었다. 좌식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특히 가부좌 틀고 밥 먹는 건 질색이다.  


안동 도산면 국학진흥원에 15명이 집결했다. 안동 사람 몇 명 빼고는 다양한 지역에서 참가자가 모였다. 수도권에서도 5명이나 왔다. 다들 인스타그램을 보고 행사를 알았단다. 대부분 배낭이 가벼워 보였다. 무게를 재보니 7kg에 불과한 배낭도 있었다. 나는? 무려 14.5kg이나 나갔다. 부끄러웠다. 나 혼자 2박을 하는 것도 아닌데. 뺄 물건이 있나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미니멈이었다. 등산 스틱만 뺐다.


국학진흥원 뒤편 산길로 들어서니 영지산(443m)이었다. 절정의 만추를 온몸으로 느꼈고, 정상부에서 내려다보이는 안동호 풍광이 예술이었다. 안동시민은 굳이 설악산이나 내장산을 안 가도 될 것 같았다. 단풍국, 캐나다도 부럽지 않았다. 걷다 보니 슬슬 어깨가 아려왔다. 역시 짐이 문제였다. 도산서원까지 걸어가는데 계속 속도가 처졌다. 배낭을 내려놓고 서원을 구경하는데 날아갈 듯했다.

이번에 걸은 길은 안동 선비순례길 7코스였다. 퇴계 이황 선생 관련 유적이 많았는데 솔직히 서원이나 종택이 흥미롭진 않았다. 15kg 가까운 배낭을 이고 유격 훈련처럼 걷는데 500년 전 어르신의 생애나 가르침에 감탄하면 그게 비정상 아니겠나. 그래도 퇴계가 걷던 길은 정말 멋졌다. 과연 퇴계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라고 노래할 만한 풍광이 펼쳐졌다. 이육사 시인이 여러 시의 영감을 얻었다는 길도 걸었다. 곳곳에 육사의 시가 전시돼 있었다. 청포도, 광야 등등. 100년 전 시인의 생애나 작품이 가슴에 사무치진 않았다. 뒷허벅지가 심하게 조여왔다.


어스름할 무렵 박지(백패커들은 야영지를 이렇게 부른다)에 도착했다. 스마트워치를 확인해보니 3만 보를 걸었다. 이동거리는 17km. 박지는 낙동강 상류변, 래프팅 업체가 운영하는 펜션 마당이었다. 텐트를 설치하고 둥그렇게 둘러앉아 밥을 해 먹었다. 남들은 모두 캠핑용 방석에 앉았는데 나만 캠핑의자에 당당하게 앉았다. 2kg이 넘는 짐덩이가 드디어 제 역할을 하게 된 순간이다.


식사는 불을 안 쓰는 ‘비화식’으로 준비했다. 저녁은 김치볶음밥, 아침은 사골미역국. 발열체가 있는 도시락 안에 찬물을 부으면 펄펄 끓어서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백패커의 필수품이다. 놀라운 맛은 아니었지만 먹을 만했다. 백패킹 와서 많이 먹어봐야 다음날 용변 처리에 대한 부담만 커질 것 같아 간소하게 먹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원래 캠핑을 갈 때도 먹는 데 목숨 거는 편이 아니다.  

다른 캠퍼들의 저녁 밥상은 무척 화려했다. 제육볶음부터 오리고기, 삼겹살까지.. 아예 소고기 토마호크까지 챙겨 온 이도 있었다. 입가심으로 떡볶이, 라면까지 먹었다. 합법적으로 취사할 수 있는 사유지여서 만찬을 즐기는 분위기였다. 음식을 나눠준 덕분에 기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아니, 근데 저렇게 먹거리를 많이 싸왔는데 어떻게 그리들 배낭이 가벼웠지? 아리송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 점 얻어먹은 토마호크는 감탄이 터지는 맛이었다.


깊은 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총총 박혀 있었다. 성단과 은하수도 보였다. 미세먼지도 없고 유독 맑았던 날, 하늘에서 별이 쏟아질 듯했다. 텐트로 들어가 침낭을 뒤집어썼다. 꿀잠을 잤다. 기온이 영하에 가까웠지만 춥진 않았다. 저녁을 잘 먹어서일까, 별을 본 감흥 때문일까.  

이튿날 일정 역시 걷기였다. 주최 측이 준비해준 안동 사과주스와 버버리찰떡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맹개마을, 농암종택 등을 둘러보고 은행나무 아래서 고산정을 바라보며 커피 타임도 가졌다. 이틀 동안 25km, 3만5000보를 걸었다. 이 정도면 첫 백패킹 치고 아주 제대로 경험한 거였다. 걷기는 아주 조금만 하고 먹고 자는데 집중한다는 뜻에서 백보킹(100보+백패킹)도 있다니 말이다.  

백패킹에 관한 중요한 키워드 2개가 있다. LNT와 BPL. LNT는 흔적을 남기지 말자(Leave No Trace)는 뜻이고, BPL은 가볍게 백패킹 하자(Backpacking Light)는 말이다. 흔적을 안 남기는 건 번거롭긴 해도 어렵진 않다. 쓰레기를 다 챙겨 오면 되니까. 근데 BPL은 쉽지 않다. 장비가 받쳐줘야 한다. 이번에 함께 걸은 참가자들을 보니 배낭도 텐트도 초경량 제품을 가져왔다. 나에게 익숙한 아웃도어, 캠핑 브랜드는 없었고 케일(Cayl)이라는 브랜드가 대세임을 확인했다. 배낭, 모자, 등산복 할 것 없이 케일 로고를 숱하게 봤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가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니까 가벼운 백패킹이란 가볍고 헐렁한 마음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음, 더 가벼운 다음 백패킹을 위해 저축부터 해야 할까 보다. 좀 허망한 결론인가? 사실 어떤 스포츠건 취미건 맛을 들이면 이런 식으로 생각이 흐른다. 그러니까 기승전장비탓. 알 사람은 알 테다. 적절히 좋은 장비가 ‘덕질’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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