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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Feb 20. 2023

정원보다 공원, 공원이 없다면 캠퍼스라도

다시, 치앙마이 ②

여행하기 좋은 도시의 기준은? 멋진 박물관이 많고 대중교통이 편한 유럽 주요 국가의 수도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테고 숙소와 밥 값이 저렴한 동남아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MBTI처럼 툭 치면 탁 하고 나오는 대답은 아니지만(사실 내 MBTI도 모름), 요즘 생각을 묻는다면 ‘달리기 좋은 도시’라고 답하겠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다녀온 태국 치앙마이가 어땠냐고 묻는다면, 좋은 점수를 주긴 쉽지 않다. 그럼에도 구원과 같은 장소를 발견했으니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코로나 펜데믹 이전에 치앙마이를 갔을 때는 달릴 생각을 안 했다. 아니, 바쁘고 피곤한 여행 중에 웬 달리기? 어쨌거나 치앙마이는 여행하기 좋은 도시였다. 물가 싸고, 맛난 음식 많고, 사람들은 친절하고, 여기저기 쏘다니기 좋았다. 도시가 아담해서 걷거나 그랩, 툭툭이를 타고 다니면서 불편하다는 생각을 전혀 안 해봤다. 무엇보다 초침, 분침이 서서히 움직이는 것처럼 여유롭고 느슨한 분위기가 마냥 좋았다.


한데 내가 달라졌다. 2년 전부터 달리기가 취미를 넘어 일상의 한 부분이 됐다. 집에 있을 때뿐 아니라 출장을 가든 여행을 가든 기회가 생기면 달렸다.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를 달리는 것, 그 자체가 좋았다. 심박수가 치솟은 상태에서 들이마시는 도시의 공기가 좋았고, 걷기보단 빠르고 자동차보단 느린 속도로 도시의 풍경을 느끼는 것도 색다른 재미였다. 일상적으로 달리는 현지인 틈에서 나도 일상의 한 부분을 공유한다는 기분도 각별했다. 며칠 머물다 떠날 여행객 신분이지만 몸으로 어떤 장소와 부대끼면, 부유하는 이방인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면 마라톤 완주를 몇 번 한 달리기 고수 같지만 평소 5~10km를 달리는 정도다. 조만간 하프 마라톤 도전을 앞두고 있다.)


달리기 덕분에 다시 보게 된 도시가 많다. 그냥 벽촌이라고 생각했던 강원도 화천 사내면에 의외로 달리기 좋은 하천이 있다는 걸 발견했고, 해발 700m에 자리한 강원도 평창은 한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달릴 수 있어서 기뻤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는 북적북적한 도심 한복판에 달리기 좋은 멋진 공원이 곳곳에 있어서 감탄했다.

치앙마이는? 구글 맵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도시 안에 뛸 만한 공원이 없었다. 운동장도 안 보였다. 이 도시는 어디를 가나 야자수와 흐드러진 꽃과 열대과일이 주렁주렁 열린 멋진 정원은 많았다. 그러나 공원이 없었다. 달리기를 포기하려던 순간 아내가 말했다.

“우리 숙소에서 치앙마이대학(이하 치대)이 가깝네. 내일 아침에 거길 뛰자!”

지도를 보니, 도이수텝 산 동쪽 자락에 위치한 학교는 널찍한 녹지에 안겨 있었고, 제법 큰 호수도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이튿날 아침, 여독이 풀리지 않아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숙소에서 치대까지는 약 2.5km, 걸어서 33분 거리였다. 달리면 절반 정도 걸릴 것 같았다. 숙소 앞 골목에서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 내리친 골목은 상쾌했다. 한데 상쾌한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큰 도로에 접어드니 보행로가 워낙 좁아서 달리기 쉽지 않았다. 자동차와 오토바이 소음이 심했고 겨울은 건기여서 먼지도 많이 날렸다. 그나마도 좁은 보행로는 곳곳이 공사 중이었고, 보도블록도 울퉁불퉁해서 발목을 접질리기 쉬워 보였다. 아내는 계속 마른기침을 했다. “아휴, 길 상태가 정말 엉망이네.”

기어이 정문을 통과해 대학으로 들어섰다. 딴 나라에 온 것 같았다. 먼지 풀풀 날리는 도로와 달리 고요한  이름 모를 아름드리나무와 야자수가 우거진 초록세상이 펼쳐졌다. 자동차와 오토바이 소음 대신에 온갖 새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내와 나는 모터라도 장착한 것처럼 다시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니 앙깨우 호수가 나왔다. 잠실 석촌호수 정도의 아담한 호수였는데 물가에 바짝 붙은 산책로를 달리는 사람이 많았다. 다른 나라에 와서 함께 달리는 사람을 만나면 동질감이 느껴져 괜히 반갑다. 호수 뒤편에는 병풍처럼 뻗은 산세가 근사했다. 한국의 단풍처럼 샛노랑, 새빨강은 아니어도 옅은 갈빛이 도는 산림이 호수에 비쳐 더 진득한 색채를 띠었다. 일년 내내 여름만 있을 것 같은 남국의 산천이 이런 색을 낸다는 게 신기했다.  


이 풍경 안에 더 머물고 싶었다. 더 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숙소에 예약해 둔 아침식사 시간을 지켜야 했던 터라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다시 학교 후문으로 나가 먼지 폴폴 풍기는 도로를 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애플워치를 보니 약 7km를 달렸다. 뿌듯했다. 아침식사가 꿀맛이었다.

이후 치대를 두 번 더 방문했다. 후문 쪽에서 매일 야시장이 열리는데 저렴한 길거리 음식을 파는 노점상이 약 100m 거리만큼 늘어선다. 아내 지인이 추천해 준 가게에서 해물라면을 먹었다. 눈물이 났다. 너무 매워서, 그런데도 너무 맛있어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배도 꺼트릴 겸 학교를 산책했는데 교복 입은 대학생들이 어울려 노는 모습이 풋풋해 보였다. 클럽 활동을 하고 농구 같은 운동을 하는 청춘들을 지긋이 바라봤다. 농구 코트 위쪽으로 비행기가 수시로 날아다녔는데, 농구장과 청춘들 그 주변을 두른 야자수와 무심히 하늘을 지나가는 비행기가 어우러진 풍경이 이국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치대 아침 달리기를 한 번 더 하고 싶었지만 아내가 식중독으로 컨디션이 떨어졌던 터라 자전거 산책을 선택했다. 서울 따릉이 같은 공유자전거를 빌려 학교를 구석구석 둘러봤다. 달리기 좋은 캠퍼스는 자전거 타기도 좋았다. 호숫가 카페 야외 좌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누리고 싶었지만 이날도 숙소 조식을 예약해 뒀던 터라 복귀해야만 했다. 숙소로 돌아가 배불리 조식을 먹긴 했지만 호숫가 카페에서의 여유를 놓친 건 두고두고 아쉬웠다.

정원은 많지만 공원은 드문 도시, 치앙마이. 그래도 치대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내와 나는 언젠가 다시 치앙마이를 찾는다면 최대한 대학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고 이 좋은 캠퍼스를 더 많이 누려보자고 의기투합했다. 물론 호숫가 카페에서 커피도, 샌드위치도 반드시 먹어야 할 테고, 그러려면 숙소 조식은 과감히 포기해야 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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