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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울 Aug 22. 2023

반장선거

 아스라히 긴 복도 끝에 교실이 있다. 뒷문은 사용금지,  앞문에는 '다른 반 학생 출입금지' 라고 적힌 종이가  눈길을 끈다. 등교개학의 훼방꾼이었던 코로나 바이러스마저도 문턱을 넘어서기엔 주저되는 출입문을 열고 들어선다. 나의 침방울이 날아가는 걸 막으려고 맨 앞줄에는 희뿌연 보호막이 설치되어 있다.  하얀 블라우스에 뽀오얀  마스크를 쓴 여고생들이 갓 쪄낸 백설기처럼 앉아있다. 창 밖에 은행나무는 푸른빛이 한창이고  햇살은 교실 안을 수시로 기웃거린다. 

 입학식도 없이 여고생이 된 아이들이다. 더구나 꼬박 백여일 동안  생이별을 시켰으니 서로에 대한 갈증이 얼마나 깊을까. 사회적 거리두기  따위는 망각하기 일쑤다. 이야기꽃을 피우던 오십 네개의 눈동자가 일시에 나를 향한다. 등교한 지 삼일만에 반장을 뽑자고 하니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자는 격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우물 가에서 숭늉을 찾는 심정으로 카톡을 통해 후보자를 파악하여 알리고 반나절 동안 그들의 자질을 살피라고 했다. 

 드디어 간택의 시간이 왔다. 왕의 여인이 되기 위한  절차처럼  순서는 절도있고 분위기는 사뭇 엄숙하다. 동그스럼한 얼굴에 덧니를 드러낸 미소가 귀여운 소녀가 사뿐사뿐 걸어 나온다. 배꼽에 가지런히 두 손을 포개고 인사하는 품새가  규중의 여인같다. 그러나 말문을 여는 순간 궁궐의 후궁과 여인들의 기강을 잡는 중전으로 변신했다. 또박또박, 힘있는 목소리는 선을 넘으려고 망설이는 복병을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연설은 ' 여러분, 과학시간에 배운 양성자와 중성자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로 시작되었다.  '원자핵 내의 중성자는 강한 힘을 발휘해서 원래는 뭉쳐있을 수 없는 양성자들을 하나의 원자핵의 형태가 되도록 뭉쳐주는 접착제의 역할을 합니다. 양성자는 전자를 끌어당겨서 마치 태양계행성을 끌어당기는 태양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 때  중성자는 양성자끼리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학급에서 저는 중성자 같은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소외되는 친구가 없는 학급으로 이끌고 싶습니다' 그녀의 각오에 작은 탄성이 여기저기서 쏟아지고 창틀에 걸치고 있던 나의 두손이 저절로 모아졌다.

 시댁 식구들 중에서 오랜 세월  중성자 같이 살아온 분이 있다. 그는 손끝이 야물고 강단이 있어서 일찍이 농사일의 적임자로 시아버지의 인정을 받았다. 공부하러 도시로 유학 떠난 형을 대신하라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었다. 그러나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해도 살림살이의 주름살은  펴질 줄 몰랐다. 호롱불 아래서 그의 고민은 깊었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어둠이 내리면 잠자리에 들기를 강요하는 아버지의 불호령에서  동생들을 구할 방법을 생각하느라  밥잠을 설쳤다. 

 보리 한 말을 어깨에 실었다. 사립문을 나서며 시아버지가 잠드신 사랑채를 향해 용서를 구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가난에서 가족을 건져올릴 것이라는 마음을 올리며 여우고개를 넘었다. 배운 것도 없고 기술도 없는 그가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단순노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워낙 성실하게 일을 하니, 눈여겨 보던 사장이 기술을 배워보라고 권했다. 쪽방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하나를 배우면 둘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떠오르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니 흔히 말하는 기술개발로 이어졌고 두세배의 월급을  받았다. 

푼푼이 모은 돈을 쪼개어  마른 버짐이 꽃처럼 핀 동생들의 학용품을 살때  그의 나이는 고작 열일곱이었다. 배움에 굶주린 그가 급기야 단칸방 신혼살이에 동생들을 불러 들였다. 어린 동생들의 분탕질이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그는 묵묵히 씻기고 입히고 대학교육까지 뒷바라지를 했다.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어서 사업은 나날이 확장이 되었고 반듯한  중소기업을 꾸리게 되었으니 자수성가의 롤모델이 되었다. 

 그는 집안에 대소사를 챙기며 동생들이 삶의 마디를 만날 때마다  팔을 걷어부쳤다. 어느 날, 며느리까지 맞이한 늙은 동생이 세상의 꼬임에 빠져 길거리에 나앉는 처지가 되었다. 멍청하게 당하는 모습에 열불이 터진다며 그가 가해자를 찾아내고 퍼즐 조각 맞추듯 살림을 수습했었다. 또 다른 동생이 반백을 넘긴 어정쩡한 나이에 직장을 잃게 되었을 때 그가 허둥대는 모습은 실직자가 된 당사자보다 덜하지 않았다. 동생들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수시로 백숙을 손수 끓여 먹이며 시린 맘을 달래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용기내라는 말과 함께 지폐 서너장을 쥐어줄 때 나는 눈앞이 흐려져서 고맙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얼마 전에는 이 산 저 산에 흩어진 묘를 한 곳으로 모으는 이장에 대한 형제간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막상 일을 시작하자  앞장서겠거니 믿었던 맏이는 강건너 불구경이었다. 산소를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난다는 말에 서로 힐끗힐끗 피하는 눈치다. 서로의 맘은 조각나기 시작했다. 또 칠순을 훌쩍 넘긴 그가 팔을 걷어부쳤다. 풍수지리가를 불러 터를 살피고, 산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도 치렀다. 일일이 살피고 조율한 그의 노력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흩어질 뻔했던 조상의 묘와 가족들의 마음은 한 곳으로 모아질 수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수많은 양성자들이 돌고 있다.  서로를 밀치고  눈 흘기며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살고 있다. 교실을 가만히 들여다 보니  원자핵과 같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설핏 든다.  나는 원자핵의 주변을 도는 전자가 되어 한 해를 보내야 한다. 반장이 된 아이의 소감을 들은 후 교실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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