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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Mar 12. 2021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서

전시 <오늘들> 예술공간 영주맨션 (2021.2.19-2.27.)

 이성미 시인의 시구에서 시작된 '오늘들'은 오늘을 무사히 살아내고 있는 여성 창작가들의 작업을 보여준다. 오늘은 전시의 리뷰보다는 전시의 참여작가이자 공간의 운영자로서 전시를 열고 닫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기록하고자 한다.


 작업을 만들면서 힘에 부치는 것은 '이것을 누가 볼까? 이런 노력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였다.

 전시가 없다면 당장 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목표가 없어진다. 보여줄 곳이 없을 때, 예술가에 작업이란 창작의 욕구의 실현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기 어렵다. 취미생활도 타인에게 자랑받고 인정받길 원하는 세상에서 작업은 그 한계를 더 여실히 드러내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전시를 할 수 있는 '오늘', 그리고 창작활동을 지속할 '오늘'을 갖추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루이즈 더 우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더 이상 미술계 주류가 원하는 작업이 아님을 인식하고, 누군가가 보고 싶지 않아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고민과 자괴감이 짙어질 무렵부터였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예술작업을 페미니즘 예술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지? 여성인 '나'가 화자가 되어서 대면하는 삶을 그려내는 것이 어디까지 인정받을 수 있을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되돌아보면 나는 '사랑'을 주제로 작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주류로 되돌아 갈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인정에 대한 욕망을 깨끗이 내려놓아야 했지만 그러질 못했고, 계속해서 욕망했다. 작업을 하고 싶고, 작업을 보여주고 싶고, 전시를 계속해서 하고 싶다는 욕망. 그 욕망들 때문에 작업을 지속했지만 어느 순간 내가 만든 구렁텅이에 빠져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좌절하면 존재 자체 사라지는 구조, 내게 재능이나 희망 같은 것이 사라졌더라도 나만큼은 그것을 쥐고 버티는 것이 전부인 세계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이 뭔지 돌이켜보게 했다. 주류가 원하는 예술은 여전히 쉽사리 여성을 배제하고, 폭력적인 언어로 짓눌렀다. 예술은 분명 즐겁고 아름다운 일인데 왜 매번 괴롭기만 한지 여전히 알 수가 없다. 작업이 가져다주는 고통, 좌절감, 바닥을 치는 감각들을 극복하고자 매번 미끄러지는 통로를 밟고 서있는 것 같았고 작업을 지속하는 건 무슨 의미 일까 싶었다.


 루이즈 더 우먼을 하면서 다양한 작가들을 만나고, 서로의 작업에 대해서 좀 더 본격적으로 피드백하는 프로그램들을 경험하면서, 나는 나의 잘못된 생각들을 확인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향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좀 더 몸으로 인식하게 했고, 그동안 내가 해오던 작업에 화답했던 이들을 외면했던 건 나였음을 깨우치기도 했다. 정말 많은 여성 관람객을 만나면서 내가 했던 착각(결국 예술계에 발을 딛고 서있을 수 있는 건 기득권에 포함되기 위해 각개전투해 승리하는 작가들 뿐이라는 것)을 박살 냈다. 결국 내가 만들어야 했던 건 새로운 관점, 새로운 내일이 등장할 수 있게 더 많은 오늘들을 새로이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더 이상 여성이란 이유로 주류에서 배제되지 않아도 된다. 하고 있는 작업의 흐름을 계속해서 진행할 수 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일깨워주는 전시. 우리에겐 바닥을 쳐도 같은 마음으로 이 시기를 버티고 있는 작가들이 있다는 마음을 가져다주는 시간들. 그래서 정말 다행이었다. 전시를 계속해서 만들 수 있는 오늘, 작업을 생각하고 꿈꿀 수 있는 오늘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나에게 그런 오늘들이 더 많아질 것이란 걸 알려준 게 공동체가 가지는 힘이었다.


 사실 공동체는 언제든 힘을 모았다가 흩어지는, 유기적인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무수히 많은 힘을 들게 하고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실제로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만들어 나가려는 것은 그 힘이 가져다주는, 우리가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우리 안의 연결됨을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혼자로서 비롯된 고통이 아니라는 것, 구조의 문제를 함께 인식하고 있다는 것, 우리는 더 나은 내일들을 만들어나갈 것이라는 점. 그런 것들이 오늘을 살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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