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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동윤 Sep 09. 2022

별수 없게도 이번 생은 가지가 많은 나무

0.

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 나는 하나를 보고 걷지만 하나만 할 수 있는 사람 아니기에 늘 멀리 돌아간다


1.

화가 뻥- 하기 직전의 기운이 있다. 휴화산처럼 머리가 끓어 울렁거리는데 무기력한 기분. 그걸 뚫고 뻥 터뜨려야 한다. 한 보 뒤에서 나는. 참는다. 넘지 못하고 자꾸 회피만. 의지는 있나? 좌절한다. 반복에 반복. 진짜 화난다.


2.

노란 전구 수십 개에 불이 들고. 낮게 가라앉은 실습실에는 주저하는 세 명의 학인. 하나는 친구의 아픔을 추스르지 못한 채, 하나는 고민으로 밤잠을 설친 채, 남은 하나는 그들의 감정을 빨아들이고. 각자의 분위기가 전체에 퍼지고. 투명한 물통에 색깔이 묻은 붓을 휘저어 빠는 것처럼. 나는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이 아니다. 숨을 쉴 때 더욱이. 그래서 보통의 나날들에 나는 가만히 존재한다.


공감만으로 아픔을 치유할 수 없다. 각자의 아픔은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고 이해란 아픔이 가진 공간에 들어가 각자 공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 결국 아픔은 공감할 수 없고 누군가 나서서 치유할 수 없으니 아픔은 어떻게 고쳐야 하나. 본인의 고통이 가장 큰 법이다. 그걸 아는 사람의 아픔은 들어줄 수 있다.


들여다볼 때. 입장을 말할 때. 변화를 주려면 먼저 내가 단단해야 하는데 나는 바위가 아닌 호수의 운명을 타고나서. 모두를 품을 수 있다 자신하던 호수에 티라노가 뛰어들면 넘쳐흐른다. 호수가 바다라면. 공룡을 품어도 동요하지 않을 그릇이라면. 물도 바위처럼 단단하다 말할 수 있을까. 수면에 맞닿은 흙바닥은 늘 축축하게 젖어있다.


3.

주절주절주절. 못하는 이유가 너무 많다. 맨손으로 성을 쌓던 때는 지났다며 새로 산 포크레인을 파묻었다. 굳은살 박힌 손을 모아 포크레인 위에 모래를 쌓는 멍청한 내가 있다.


4.

하루 두 잔의 커피를 마신다. 언젠가 경제학 강의에서 들은 효용의 정의에서. 어떤 물건을 사는 만족감에 얼마의 가치를 두고 얼마의 돈을 낼 것인가. 하루 커피 두 잔은 만 원. 커피를 연달아 두 잔 마시며 나는 만 원 이상의 효용을 확신한다. 커피를 마시지 못하면 하루 만 원의 효용도 못 낼 것이다. 커피는 연료입니다. 여동윤 공장에 기름 대신 커피를 넣어요. 그럼 알아서 생산을 해낸답니다. 생산품이 생산적 일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술담배를 안 해 늘 억울합니다. 커피를 마셔야겠어요 가끔은 케이크도 먹고요.



5.

비가 오는 날에도 아이들이 하교할 때면 분수를 켜는 어느 아파트 관리인처럼


6.

음표처럼 감정은 쌓이고 분해되고 흘러간다. 아랫 블럭 꺼내서 윗 단으로 쌓아 올리는 젠가 놀이를 반복한다. 덧없다. 소멸되는 젠가 블럭 없듯이 사라지는 감정 없다. 낯선 공간으로 쌓여갈 뿐이다.


감정을 내보일 때 배우의 연약함이 드러난다. 연약함. 다른 말로 매력. 연약함은 물안개로 가득 찬 화장실에 알몸으로 들어서는 것과 같다. 수증기로 짙뿌연 유리창에 한가득 물을 뿌리면. 거울 앞에 잔상이 깜박 켜졌다가 얄궂게 사라진다. 수증기를 걷어내려면. 샤워 호스를 틀어 물을 쏘아대는 방법과 애초부터 수증기를 만들지 않는 법이 있는데. 나는 저 모호함을 깨고 싶지 않다. 익숙함을 깨고 물을 끼얹는 건 용기에 달렸다. 안개가 걷히고 드러나는 형상은. 알몸이나 다름없는데. 부담스럽지않다부담스럽지않다. 연약함을 마주하는 게 용기라는데. 나는 그동안 허튼 연습을 했다.


7.

웃기는 일이다. 마이즈너를 처음 배울 때는 레피티션이 대사보다 어렵더니 레피티션이 익숙해지니 대사가 배는 어렵다.


기분 나쁜 일이다. 대사 할 때 나는 왜 화에 미치지 못할까. 레피티션처럼. 돌발적인 화를 대사에 싣지 못할까.


사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깊이 기분 나쁘고. 깊이 짜증 나고. 깊이 아파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왜 나는 어려운 일에 매달릴까. 다시 원점이다.


*레피티션은 마이즈너 테크닉 연기 훈련법이다.



8.

에너지가 빡 들어왔는데. 느꼈지만 받아치지 못했다. 내보내지 못하고 남은 감정이 화라면. 정지한 상태에서 내보낼 감정도 화. 하지만 오로지 변칙적인 에너지만이 흥미로우니. 잔잔한 물결이던 거친 파랑이이던. 곡선 그래프가 어느 축이던 끊기지만 않는다면. 나는 예기치 못한 곳에 점을 찍어야 한다. 학부 때 배운 도형의 엇갈림. 게슈탈트. 대비. 보색. 게나랄파우제. 유리와 콘크리트.


9.

가지를 뻗을 수록 삶은 확장된다. 선택은 두 가지다. 높이와 폭. 늘 처음과 같고, 늘 주저하는 일이다. 어제는 촬영이 있었다. 나는 배우지만 이따금 내가 배우인가. 자신에게 묻는 날이 많다. 걸쳐놓은 다리가 많아 혹자는 뭐하는 놈이지 싶을테지만 늘 지향하는 곳은 하나라 자부한다. 배우. 그렇다면 왜 자신을 배우라 소개하지 않는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직업 배우라 할만큼 역할에 대해, 준비에 대해, 완성도에 대해, 영화에 대해, 산업에 대해. 나는 아직도 모른다. 헤매면서 나는 자꾸 딴짓을 한다. 힘을 모아 큰 줄기를 위로 쏘아야 하는데 자꾸만 옆으로 벌어진다.


보이지 않는 곳에 문신을 새긴다. 항상 오늘의 판단을 경계해야 한다. 문신을 새기는 것과 나무가 자라는 것. 이들은 결이 같다. 추상적으로 늘어난 가지가 아름답다. 우후죽순. 아직 새끼 나무니까. 나이가 들수록 느낀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어른들 말씀이 맞았다. 처음 영상에 출연할 때 나는 온전히 느끼지도 못하면서 느끼는 척 연기했다. 꿈을 꾼 것이다. 벌벌 떨던 모습이 잘생겼다 해죽이며 친구에게 자랑했던 그 날. 오디션에 나가 엄청난 연기로 소속사 팀장님의 고개를 떨궜던 그 날. 이제는 잠 잘때도 꿈을 꾸지 않는다. 치기 어린 날이 모여 줄기에 무늬를 새긴다지만. 높은 나무 그늘 밑에 가려진 낮은 나무로 지내기를 원치 않는다.


세피아색 나무 줄기도 시간이 지나면 진갈색 밑동이 된다. 하늘을 뚫고 첨탑처럼 솟은 나무 줄기에 첫 가지가 뻗쳤을 때. 연이는 나뭇가지의 발아는 배우의 길과 거리가 멀었다. 이천십구 년. 스물여섯의 나는 연기를 포기했다. 더이상 오디션에 지원하지 않았고 그저 건장한 사회 속 일원이 되기 위해, 하나둘 차는 나이에 걸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썼다. 카페를 차렸고, 주식을 배웠고. 퇴근하고 친구들을 만나 술자리를 가졌다. 웃는 법을 다시 배우고 어울려 노는 법을 익혔다. 긴장 풀린 몽롱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시간은 이전보다 빠르게 흘렀다.


꿈을 버린지 5개월 째 되는 날 뭔가에 홀린 듯 오디션에 지원했다. 오디션을 보라는 연락이 왔고 준비도 제대로 안 해 완전히 망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 합격했다는 메시지를 받았는데 논리에 맞지 않았다. 촬영 도중에도 의문이 가득했다. 노력하지 않은 내게 생긴 기회에 대하여. 누군가는 지난 날의 내가 그랬듯 밤잠을 설치며 오디션을 준비했을텐데. 감독하던 친구는 나와 동갑이었다. 촬영을 하고 훨씬 지나 그에게 물었다.


'왜 나를 뽑았어?'


감독하던 친구가 말했다.


'너가 서있을 때 외로운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나에게 제일 중요했던 풀샷이 잘 어울려서'


나무는 스스로 자라지 않는다. 중요한 건 높이의 싸움이 아니다. 폭과 깊이. 무늬의 문양. 가치는 하나에 머무르지 않는다. 기회는 언젠가 찾아오고, 나를 배우로 기능하게끔 도와주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나는 시간을 버텨내며 가지를 뻗어야 한다. 창업한 카페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 공간을 지키며 묵묵히 내 할 일을 하면 된다. 차이가 있다면 카페 사장은 어엿한 사회인. 무명 배우는 사회인을 벗어난 사회인. 상관없다. 무명이어도 배우로. 영화인으로. 남은 건 어디로든 가지를 뻗고 밑으로 뿌리를 내는 일 뿐이다. 운동으로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만들고. 세상과 부딪쳐 가지를 낸다. 그러다 보면 오롯이 나만이 갖는 독특한 나무의 모양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싸인 함수 그래프에 점이 찍힐 때. 건조하게 굳은듯 보인 나뭇가지 맨끝점에서 환한 연두빛 싹이 트는 순간이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어쨌든 불안은 잦아들었다.


그래서 길을 걷다 암갈색 나무 끝에서 생생한 연두빛깔 싹이 트는 모습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다. 새싹이 발아하는 그 순간. 나의 관심은 오롯이. 끝단에 싹을 튼 나뭇가지의 밑동이다.


10.

또 하나의 촬영이 끝났다. 조금씩 컷에 욕심을 내는 모습을 보니 나무는 잘 자라고 있는 것 같다. 레슨을 도맡은 선배는 곧 있을 상업 오디션에 집중해줬으면 했지만 머리는 "선배님 생각이 맞지요" 끄덕이면서도 마음은 단편 현장을 놓지 못한다. 모두 제작비가 낮은 단편 영화. 항상 나를 대변해 현실적인 걱정해주는 사람들에 감사하다. 그들의 말이 맞다. 경외하는 배우를 직업으로 살기 위해서는 결국 상업 영화와 드라마에 안착해야한다. 단편 현장에서 나는 배우라 불리지만 스스로의 위치를 알기에 마음이 허하다. 나는 5년차 배우고시생. 상업 오디션을 앞둔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러다 또 단편 현장에 나간다. 언제나 문제는 선택. 홈런과 안타를 놓고. 무거운 책임은 항상 어깨에 얹어있다. 나는 그 무게가 간지럽고 신경쓰인다. 결과에 대한 마음의 준비는 언제나 하고있다. 모르지 않는다.



11.

나의 문장이 향하는 곳이 버텨내는 삶이 아닌 고요 속의 일상이기를 바란다. 선택은 도끼로 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아서. 어떤 사람은 갈라진 밑동만 보이겠다만, 어떤 사람은 장작의 부가적 기능과 커다란 나무에 가려져 햇빛 못 받는 근처의 풀잎들에게 잘려나간 몸통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일 것이다. 하루는 그런 생각을 했다. 진녹색 우거진 풀숲에서 나는 도끼질을 하는 나무꾼이다. 나에게는 금방 잘려 밑동을 드러낸 나무가 있고.


'저 놈. 내일은 기필코 베리라'


다짐하고 10년을 때리는 나무가 있다. 10년을 베어야 쓰러지는 나무는 당연하게도 금방 기우는 일이 없다. 그런 녀석들은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는다. 반년을 때려야 작은 흠집이 생긴다. 하여 가끔은 그 나무에 기대어 쉬기도. 주변의 다른 얇은 나무를 정리하기도 하며 긴 싸움을 한다. 직업이 나무꾼인지라 나무를 베어야 먹고산다만 이 나무꾼은 나무를 심기도 한다. 또 한 그루의 10년짜리 나무를 기대하며, 노동으로 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은 허리를 접어, 무른 땅에 씨앗을 찔러 넣는다. 나무를 베고 심는 나무꾼은. 또 하나의 나무다. 마침내 10년짜리 나무가 자신을 허락하는 것은. 모두가 나무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그녀에게는 다시는 시를 쓰지 않으려 맘 먹은 날들이 많았다.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치며, 등단을 하고도 알바를 하며 생활했단다. 하지만 시는 옷깃에 묻은 먼지처럼 쉽게 털 수 있는 게 아니여서. 어느샌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시를 쓴다고 했다.


인생을 꾹 눌러 담은 시. 그녀의 문장을 닮으려 여러 번 필사했다. 비슷한 결을 가진 내가 낯설다. 고압스런 문장의 분위기 탓에 어둠에 침잠될까 걱정하는 엄마를 위해서라도. 나는 나에게 맞는 나무와 문장을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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