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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동윤 Dec 28. 2022

영화, 프리 프로덕션

0.

프리프로덕션

드라마나 영화 따위를 제작할 때, 대본이나 시나리오가 완성된 후 촬영을 준비하는 일. 제작진 구성, 배역 확정, 각종 장비 준비, 스토리보드ㆍ콘티 작성 따위의 작업을 통틀어 이른다.


1.

눈물이 많아 걱정이다. 나는 그것이 주체가 안 된다. 그래서 참는다. 참는다고 참아지면 그게 사람이겠냐마는 나를 보는 사람들에게 폐끼치지 않으려면.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하지만 수도꼭지가 느슨해 눈물을 아주 멈출 수는 없다. 한 번은 수도를 그냥 풀어놓았다. 바닥을 뚫어버릴 듯 떨어지던 눈물도 어느새 뚝뚝 그쳐버렸다. 이후로 더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나는 내 눈물이 그리웠다.


2.

요사이 며칠간 나를 들뜨게 만들고 소멸한 모든 것들에 대하여. 안타까움으로 넘기기에 못 본 척 지나갈 수 없고. 넘기지 않고 들여보자니 꽁꽁 묶어 나를 괴롭게 만든다.


오산이었다. 몸은 게으르고 열정은 애 같다. 시작부터 모든 땔감을 태우니 마감이 다가와도 불을 지필 힘이 없다.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게으름과 열정을 가르는 건 순간의 선택. 오늘까지 물음을 유보하려다가도. 이빨 사이 시금치가 낀 것 같은 이 찝찝함을. 더는 모른 체 할 수 없어서.


3.

내게 글쓰기를 배우는 웹소설 작가 지망생 고등학생이 저는 웹소설을 자주 읽어요, 자랑하기에 그것은 네 취미고 공부를 위해 고전이나 문학을 가까이하라 일러주었다. 곰처럼 생긴 고등학생이 검은 뿔테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최근 영화를 찍는다며 영화를 하루에도 수어 편은 보는데 간사하게. 나도 이것을 공부라 생각했다. 곰발바닥 같은 손으로 뿔테를 집어 올리던 그 남자 고등학생이 떠올라 멋쩍은 오후였다.


4.

오디션 공고를 시작했다. 공고 글 올릴 여유도 없었으나 페이도 제대로 못 주는데 예의는 갖추고파 조연출 일감을 빼앗아 직접 썼다.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블루박스 메일함에는 수많은 배우들의 지원서가 쌓였다. 각각의 이름을 클릭하면 그들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네모난 카드가 있다. 한참을 보았다. 영화는 결국 이미지 캐스팅. 배우로서 방식을 불평하던 나는 똑같은 입장이 되어 배우를 찾았다.


삼십 분만에 나는 백 명이 넘는 배우들을 보았다. 단 삼십 분만에. 나는 백 명이 넘는 배우들의 역사를 처리했다. 상상 속 이미지를 옮긴 것 같아 소름 돋은 배우가 있었고, 음소거된 연기 영상으로도 눈물을 차오르게 만든 배우가 있었다. 내 하찮은 메일함에는 지원해줬으면 하던 배우가 있고 전 소속사 동료 배우가 있다. 얼굴을 확인하고 나는 그들의 페이지를 내렸다. 숭고의 길로 향하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채점할 수 없다. 같은 길을 걷는 동료 배우들을. 작품 위한 오디션이라며 상처를 낼 수 없다. 나약한 결론이다.


오디션으로 지인 배우들은 올리지 못했다. 내 마음은 위선 덩어리다. 말로만 위한다며 그들의 기회를 빼앗는다. 오디션은 영화를 위한 필연의 작업이다. 나는 왜 아파하는가. 좋은 감독은 될 수 없겠다.


5.

오디션으로 많은 배우를 만났고 세상에는 좋은 배우가 지천에 있음을 눈으로 확인했다. 멍청하게도. 다녀간 배우들의 프로필을 넘기며 그들 사이 나를 대입시켜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점지하는 내가 있다. 포지션에 대한 회의감. 물론 겁도 났다. 쇼미 더 머니에 증명하러 나온 수많은 언더래퍼들은 그간의 작업물이라도 있는데. 나는 잘 나아가고 있는가. 두려움. 언제나 몸 가득히 달라붙은 증명 욕구들. 애증이 가득한 아픈 손가락. 내 직업.


곧 영화를 찍는다. 블루박스. 투자해주신 대표님께서 말씀하셨다. 동윤 씨. 누군가 동윤 씨를 돕는대도 글 쓴 사람과 돈 쓴 사람만큼 신경 쓸 수 없어요. 그게 현실이다. 알고 있지만 인정하기 싫은 게 있다. 나는 곧 서른이고 주위 사람들은 내 또래. 각자 어려운 갓생 속에서. 도와주는 이들은 대게 여전히 하고 싶은 걸 꿈꾸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다. 꿈꾸는 사람은 블루박스가 명사다. 블루박스를 몸에 짊어지고 할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자주 코피가 난다. 코 끝에 붉음이 매여있다. 붉음은 내게 긍정이었다. 카페를 열었을 때, 전시와 연기와 학교를 병행했을 때에도 매일 밤 코피가 났다. 바쁨을 인지할 여유가 없을 때 코피가 난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오늘은 외로운 부정이다. 처음 붉음이 지속적으로 매여있음을 인지하던 때를 기억한다. 낯섦에 우쭐하던. 어른이 된 것 같았던. 당시 만나던 이성에게 뽐내듯 자랑했다. 내 몸이 생성한 붉음이 곧 자랑이었던 시절. 지금은 그렇지 않다.


연기를 하고 싶다. 나는 연기가 하고 싶다. 공들여 쓴 작품을 연기하는 배우들에 질투가 난다. 촬영이 겨우 15일 안팎으로 다가온 시점에 선 나는. 어리광과 달리 이 작업이 제법 내게 맞음을 느끼고. 생각보다 소질이 있음을 느끼고. 내게 엮인 책임의 크기가 거대함을 느낀다. 영화 프리 프로덕션을 시작하고 몸 전체에, 특히 주로 타자를 치고 그림을 그리는 오른쪽 팔뚝이 시리다. 감기는 아니다. 연기를 하고 싶다.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연기를 할 때에. 입과 눈에 힘이 들어가 그것을 이완시키는데 상당한 노력이 들었다. 영화를 준비하며. 강도 높은 노동이 반복되면 쓸데없는 긴장은 자연스레 풀리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노동은 신성한 것이고 노동자의 얼굴이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것처럼. 나는 노동자의 얼굴로 영화를 기획했고, 투자 유치에 성공했고, 사람들을 모았으니. 이 작은 프로덕션을 위해 더욱 노동할 의무가 있다.


영화가 고독이었음을. 상처도 행복도 모두 사람에 있고 내게도 노동자의 얼굴이 생겼으니 나는 연기를 전보다 더 잘할 수 있겠다. 이럴 여유가 없는데. 사치를 부릴 수 있는 건 상상뿐이다.


6.

운이 좋은 사람들은 그러니까 성공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꾸준히 여러 번 시도를 해서 성공 확률을 높이는 사람이며, 실패했을 때 오래 끌어안고 앓기보다 금방 털고 일어나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그런 걸 회복 탄력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p.26,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큰 장소를 요구한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7.

역경 끝에 취하는 결실은 실로 달콤하다. 결실을 쟁취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건 작은 보상들. 이를테면 독서와 글쓰기로 흔들리는 멘탈을 잡아주는 것. 묵은 짐을 토해내지 못했더라면 급작스런 헤드 스텝들의 이탈에 나는 무너졌을 것이다. 쓸데없는 불안은 직면한다. 니체의 말.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 요즘의 내 머릿속에 박아두는 아포리즘 글귀들. 부정적인 생각이 나도 몰래 체내에 축적된 독소처럼 싫은 기운 가득 품고, 특히 머리를 메운다. 걷자. 걷는 게 답이다. 더 자주 걷고 숨을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이 참 간사한 게. 어제까지만 해도 지금 가진 것에 불평하고 낙담했다. 하지만 12시간도 채 안 지난 오늘. 내 곁을 지키는 사람들의 존재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8.

보여주고 싶다. 누구에게? 증명하고 싶다. 누구에게? 내 삶은 보임과 증명의 연속이다. 몸을 이루는 세포들은 증명에 익숙하다.


촬영 디데이가 내려가면 새로운 변수가 생긴다. 가장 먼저 잡음이 들리면 곧이어 갈등이 터지고 생애 처음 부탁하는 입장에 선 나는 아기의 얼굴이다. 안면에 철갑을 씌워 부딪쳐야 하나. 여러분 나를 믿으세요. 우리는 해낼 겁니다. 나는 검은 화면에 대고 목놓아 외친다. 긴 창을 집은 검투사의 투구 속 파란 입술이 달달 떨린다. 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어금니로 입 속 연한 살을 씹는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가 무너질 텐데.


지나간 말들은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다. 그들의 약속이 담긴 기억 음성사서함에 꼭 삭제 버튼이 보이는 것 같아서. 나는 리셋하고 현재를 살기로 했다. 언어가 소멸되니 훨씬 적은 사람이 남았다. 링 위에 패배해도 내 손을 들어줄 사람들. 나는 그들이 밉다. 딱 영화 촬영 때까지만 밉고. 그 미운 모습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9.

딱 이번까지만 타인에게 기대할 것이다. 딱 이번까지만. 결과가 증명해 준다면. 좀 더 나은 확신으로 그때는.


10.

당연한 도움은 없었다. 공공을 위해 투쟁한다던 누구는 상인이었고. 지나가며 뱉은 말은 지나가는 말뿐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도움을 청하기 전에도 응했을 때에도. 그들이 결국 떠날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정말 알았다. 알면서도 그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11.

열네 시간씩 열네 밤을 일하면. 입술이 붓는다. 몸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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