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볕 Nov 30. 2023

삶의 여정에서

어릴 때 살던 동네엔 호떡집이 있었다. 핫도그와 떡볶이도 함께 팔아서 동네 아이들의 참새방앗간이었던 곳. 하나에 백 원인가 이백 원이었던 호떡은 달콤한 설탕잼이 가득 들어 있어서 내가 가장 좋아하던 간식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오랜만에 옛 동네를 찾았다.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내 기억 속의 아주머니였던 할머니는 돈을 많이 버셨는지 노점을 없애고 번듯한 상가건물을 지어 올리셨. 허름한 포장마차가 건물로 바뀌었어도 할머니는 변함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자리에서 호떡과 떡볶이를 팔고 계셨다.


그렇게 옛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들르곤 했던 가게는 언젠가부터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개인 사정으로 잠시 휴업한다는 안내가 붙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할머니는 돌아오지 않았고 한참 후 암에 걸려 돌아가셨다는 말만 옛 이웃을 통해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뜨거운 불판 앞에 서서 떡볶이를 휘젓고 호떡을 굽고 핫도그를 튀겨내던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달아오른 불판 위에 놓인 하얀 아기 엉덩이 같은 호떡 반죽들차례로 뒤집어 적당히 납작해질 정도로 눌러 노릇노릇 구워내던, 그러다 가끔 옆구리가 터져 설탕이 흘러나오면 반죽을 조금 떼어 솜씨 좋게 덧방 하던 손놀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철판에 뒤집개가 부딪치 소리, 치이익-하고 반죽이 익어가던 소리, 어두운 밤을 따뜻하게 밝히던 노란 전구는 겨울 하면 자동으로 재생되는 장면으로 안에 자리 잡았다.


그다지 가깝다고는 할 수 없는, 유년의 기억 속 한 사람에 불과했던 호떡집 할머니의 부고를 듣고 마음이 먹먹했던 건 그런 옛 기억과 현재를 이어주던 마지막 끈이 사라진 듯한 상실감 때문이었으리라. 또한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고 숫자로 돈을 버는 요즘과 달리 실물을 생업의 도구로 삼아 돈을 벌던 부모님의 시대가 완전히 저물어버린 것 같은 서글픔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숫자'의 시대라고 한다면 지난 시절은 '철(鐵)'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아무것도 없던 가난한 나라에서 도로를 닦고 공장과 교량을 건설하고 자동차와 선박 등을 수출하며 기적을 일구어온 50년. 근면한 한국인의 기질 덕분에 빠르게 잘 살게 되었지만 급속한 사회변화로 인해 과거의 것들이 너무도 빨리 지워지고 있다. 옛 정취를 간직한 장소나 물건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실물이 사라지고 디지털화되고 있다. 현금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줄고, 은행 점포를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종이책 대신 전자책이 보편화되고 있다.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중년기의 노화를 겪으며 과거에 대한 향수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마음이 복잡한 요즘, 영화관에서 본 광고 한 편이 마음을 건드렸다. 처음에는 신작 출시된 게임을 홍보하는 건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철강을 생산하는 한 기업의 광고였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게임 화면 속에서 더 가볍고 견고해진 스틸 아이템을 선보이는 캐릭터들을 보니 참신한 발상에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 웃음 끝에 작은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구시대의 상징 같았던 '철(鐵)'이 변화를 시도하는 모습은 마치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미래의 자양분이 되어 계속 이어질 거라고 내게 말해주는 듯했다.


살면서 익숙하고 정든 인생의 한 시기를 떠나보내야 할 때가 찾아온다. 호떡집 할머니의 부고를 듣던 순간처럼. 하지만 지난 시절의 경험과 추억은 지워지지 않고 삶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 남는다.


제는 일흔 중반을 넘긴 노인이 된 부모님을 본다. 예전의 정정함은 사라졌어도 아직도 일을 놓지 않고 텃밭 농사도 지으시며 열심히 삶을 일구고 계신다. 옛날이 지금이나 여전히 현재를 살고 계신 두 분을 보며 과거로 흐르던 마음의 방향을 반대로 돌린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작별의 순간이 찾아오겠지만 미리 앞당겨 슬퍼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려 한다. 그렇게 쌓인 소중한 기억들은 내 안에 녹아들어 인생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리라 믿는다.


은 흔히 계절에 비유된다. 지금의 나는 아마도 가을의 초입에 서 있겠지. 싱그러운 젊음이 넘치던 여름이 그립지만 다양한 색깔로 물들어갈 나의 가을도, 생명을 잉태하고 다가올 봄을 기다릴 겨울도 기대된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완성해 가며 점 더 성숙해질 나를 기대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 오는 날의 수수부꾸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