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볕 Mar 06.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소설 <이방인>을 읽었다. 이 작품에는 그다지 호감 가지 않는 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주인공인 뫼르소다. 알제의 한 선박중개인 사무실에서 일하는 그는 매사에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며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장례식 다음날 옛 직장 동료였던 마리를 만나 해수욕을 즐기고 잠자리를 가진 데다 우연한 사건에 휘말려 한 아랍인까지 죽이게 된 그를 세상 사람들은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살인죄로 기소되었지만 모친과 관련해서 그가 보인 태도가 우발적 살인보다 더 큰 '악'으로 치부되어 법정에서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는다.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노력을 해볼 수도 있을 텐데 그는 재판 과정 내내 마치 남의 일을 지켜보듯 무심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렇게 타인에 의해 사형이 결정되어 뫼르소는 감방에 갇힌다.


몇 년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땐 무심함을 넘어 무책임해 보이는 주인공의 태도에서 불편함을 느꼈는데, 이번엔 한 사람의 목숨(아랍인의 사망)보다 세상의 관습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검사와 재판장을 보며 쓴웃음을 짓게 되었다.


그렇게 세상에서 소외되어 죽음을 기다리던 뫼르소는 감방을 찾아온 신부에게 신념이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소리치며 신앙과 구원의 유혹을 뿌리친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가 했던 선택을 떠올리며 비로소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를 생각했다. 만년에 왜 어머니가 '약혼자'를 가졌었는지, 왜 생애를 다시 꾸며보려 했는지 알 수 있을 듯했다. 그곳,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주변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을 것이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서 어머니는 해방감을 느끼며,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생겼을 것임에 틀림없다. 어느 누구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399p



생의 허망함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사랑을 시작하고, 삶을 다시 살아볼 생각을 했던 어머니를 이해하고 친밀감을 느끼며 뫼르소는 자신에게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괴로움을 씻어주고 희망을 안겨주기라도 한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 찬 밤하늘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다름없고 형제 같음을 느끼며, 나는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이제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 400p ~ 401p



평생을 현실에서 한발 물러선 듯한 태도로 일관하며 사람들의 세계에 동화되지 못했던 뫼르소는 창밖으로 보이는 무심하지만 다정한 자연에 마음을 열고 비로소 세계와 일치감을 느끼며 행복해한다. 비록 곧 사형이 집행될, 얼마 남지 않은 삶이지만 살아 있다는 명확한 인식과 함께, 닥쳐올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뫼르소를 보여주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종교를 거부하고 오직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만을 강조하는 그의 태도가 좀 불편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뜻하지 않게 불행에 휘말린 한 인간이 치열하게 고뇌하며 삶의 의미를 깨달아 가는 과정을 보며 어렵게만 느껴지던 '부조리', '실존'이라는 용어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여는 뫼르소의 모습은 과거의 내 경험과 맞물려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몇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낙오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다. 소속된 곳이 없으니 어디 가서 나를 소개해야 할 때면 자꾸 작아졌다. 사회적인 효용가치가 다해버린 것 같아 이런 삶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라는 회의감에 빠졌던 그때 나를 위로해 준건 바로 자연이었다. 비 온 뒤의 신선한 공기, 흙냄새, 촘촘하게 하늘을 수놓은 별들, 무르익은 계절의 풍경 속에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나에게로 사유를 확장시키며 존재를 긍정하는 힘을 키울 수 있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엄청난 운을 타고 난 거라던 고 이어령 선생의 말처럼 우주의 작은 티끌에 불과한 내가 계산하기조차 힘든 확률을 뚫고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비관론을 내려놓고 삶을 좀 더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왜 태어나서 살아야 하나,라는 의문을 누구나 한 번쯤 품어봤을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든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카뮈의 말에 의하면 인간과 세계는 아무 의미 없이 존재할 뿐이다. 이런 삶의 부조리성에도 불구하고 존재하고 있기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비록 허망함과 모순으로 가득한 생이지만 주체적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며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창문을 여니 한결 포근해진 공기가 밀려든다. 산책길에 보이는 나뭇가지의 꽃눈도 꽤 통통해졌다. 우리가 어떻게 살건 신경 쓰지도, 참견하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자연은 어느새 이렇게 포근해진 햇살로, 두 볼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으로 새로운 계절의 소식을 전한다. 이런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 속에 오늘도 나는 삶의 여정에 오른다.



※ 구독과 공감은 꾸준히 글을 쓰게 하는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상처를 치유하는 힘은 내 안에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