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활자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책에 빠져 살았다. 친구들보다 비교적 이른 나이인 열한 살에 안경을 끼게 된 것도(내가 유년기를 보낸 80년대에는 안경을 낀 반 친구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매일밤 이부자리에 누워 어둠침침한 불빛 아래서 책을 읽느라 시력이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던 나였지만 점점 자라면서 다른 것들에 관심을 빼앗기다 보니 자연스레 책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보다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것들이 유혹의 손짓을 보내는 세상에서 진득하게 앉아 활자에 시선을 고정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 삼십 대 중반부터 독서의 필요성을 느껴 다시 책을 가까이하고 있다.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종종 서평을 남기는 내가 지인들 눈에는 책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엔 좋아서 시작했지만 점점 서평을 쓰기 위해 의무적으로 책을 읽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서평을 남기고 SNS의 반응을 확인하고, 다른 이의 글을 읽는 행위가 분명 처음에는 내게 즐거움을 주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피로감으로 다가왔다. 수많은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어지러움을 느꼈달까.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렇게 독서와 글쓰기에서 멀어진 채 한증막을 방불케 하는 여름 날씨 속에 반쯤 정신을 놓고 지내다 처서가 지나고 더위가 한풀 꺾이니 오랜만에 다시 글이 쓰고 싶어졌다.
결과적으로 책을 읽으면 뭔가를 배우게 된다. 다만 뭔가 배우는 걸 독서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책을 읽는 즐거움이 훼손될지도 모른다. 산책하는 것이 그저 밖에 나가고 싶어서인 것처럼 책을 읽는 것도 뭔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읽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독서의 목적이 너무 분명하면 책을 읽는 재미가 없어진다.
- 기시미 이치로의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중에서
바로 이 문구 때문이었다. 사실 책 전체에서 큰 감명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이 문장은 마음을 건드렸다. 매 순간 수많은 콘텐츠가 생겨나는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상업적 색채가 짙은 볼거리가 대부분이다 보니 피로감을 느낄 때가 많다. 그래서 가끔씩 그런 의도가 담기지 않은 자연스러운 글이나 영상을 보면 너무나 반갑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는 그저 즐거워서 책을 읽었다. 거기엔 어떤 목적이 없었다. 책을 열면 매번 다른 세상이 내 앞에 펼쳐졌고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었다. 책은 유년의 나를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양식이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글쓰기가 이윤 추구의 수단이 되면서 나 역시도 목적을 가지고 읽고 쓰다 보니 독서에 대한 흥미와 열정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던 것 같다.
왜 읽고 쓰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삶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세상의 분위기는 초심을 잊게 만든다.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독서와 글쓰기가 어떠한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닌 순수한 삶의 즐거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