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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맘 Mar 24. 2024

다섯 명이서 한방에서 자는 이유

우리는 아직 서로가 고프다.

나는 직주 근접을 오래전에 포기하고 친(정)주 근접을 선택했다. 그렇게 친정이 있는 수도권에 둥지를 틀고 서울로 매일 출근길 왕복 2시간 거리의 운전을 감수하면서 얻게 된 혜택이라면 혜택 중의 하나가 방이 네 개나 있는 널찍한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구했다면 25평도 빠듯했을 금액이지만, 경기도에서는 우리 다섯 식구가 넉넉하게 지낼 수 있는 보금자리를 구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이 늘 좁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집에 오면 거의 매 순간을 아이들과 붙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요리라도 하려면 두 딸이 본인도 해보겠다며 따라 들어오고, 밥이라도 먹으려고 하면 서로 옆에 안겠다고 다툰다. 식탁에서 종종 남은 회사일을 하면 각자 책이나 문제집을 들고 와 붙어있으려고 하고,  반신욕 좀 하려는데 욕실까지 따라 들어오는 아이들 때문에 숨  구멍이 없다.


그중 가장 비논리적인 행태는 방이 네 개나 되는 집에서 다섯 식구가 오글오글 모여 잔다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로부터 70년대에 4남 2녀의 형제가 한방에 모여 잤다는 얘긴 들어봤는데 2024년도에 굳이 어른 둘에 어린이 셋이 모여 잘 이유는 무엇일까.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둘째 딸이 태어나면서 첫째와 둘째, 그리고 어른 한 명이 같이 잘 수 있도록 더블+싱글인 패밀리 침대를 샀다. 그런데 어른 한 명만 따로 자기도 애매해서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자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아이가 어린 4인가족의 무난한 선택으로 보인다. 이후 두 딸이 크면서 두 딸이 패밀리 침대에서 자고, 나와 남편은 신혼 때 쓰던 킹사이즈 침대로 독립(?)했다. 이때가 수면의 질은 가장 좋았던 것 같다.


그러다 막내가 태어났다. 안방에서 킹사이즈 침대 옆에 아기침대를 두고 막내를 재웠다. 그런데  막내가 태어나면서 큰 아이들이 엄마에게 더 찰싹 달라붙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여자팀, 남자팀을 나눠서 나는 딸들과 패밀리 침대에서, 남편은 킹사이즈 침대에서 아기침대에서 자는 막내를 재우게 되었다. 그러나 곧 막내가 커서 누나들과 함께 자고 싶어 하면서 남편은 패밀리침대가 있는 곳으로 강제소환되었다. 다섯 식구가 한방에 모이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이제 우리는 여자팀은 패밀리 침대에서, 남자팀은 패밀리 침대밑에 이불을 깔고 잔다.


이렇게 다 모여자는 것의 최대 장점은, 아이들의 달큼한 살냄새를 맡으며 잘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패밀리침대에서 두 딸 사이에서 자는데 그 큰 침대에서 자면서도 내 곁으로 모여드는 딸들 덕분에 보들보들 쫀득쫀득한 아이들의 얼굴 자기 전과 아침 일찍 원 없이 감상할 수 있다. 여기다 자기 직전 하루를 돌이키며 주고받는 아이들과의 진솔한(?) 대화는 덤이다. 잠들기 직전의 아이들은 와인이라도 한잔한 어른들처럼 하루에 있었던 일을 술술 털어놓는다.


비록 발밑에서 자긴 하지만 막내아들도 다 같이 모여 잠들기 직전의 이 시간을 좋아한다. 침대를 수없이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엄마한테 갔다가 아빠한테 갔다가 하루종일 일하러 가서 보지 못했던 엄마아빠와 편안하고 친숙한 시간을 보낸다. 이 시간은 마치 오랜 시간 서로 떨어져 있던 연인이 만나 서로에 대한 허기를 채워가든 소중하고 애틋하다(물론 가끔은 내가 먼저 잠들어버리거나, 너무 졸린 나머지 "빨리 자!" 소리를 지르며 끝나기도 한다^^;;)


이처럼 너무나 소중한 시간의 대가는 적지 않다. 일단 양 쪽에서 내가 있는 쪽으로 파고드는 따님 분에 자다가 자주 깰 수밖에 없다. 남편은 편안한 침대를 두고, 굳이 바닥에서 자면서 허리가 불편하다고 한다. 게다가 주말에 골프를 치기 위해 새벽에 조용히 나가는 길에 덩달아 아이들 한두 명이 깰 위험도 늘 도사리고 있다. 오죽하면 5인용 침대를 구비해 거실에서 잘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래도 이러한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다섯 명이 굳이 떨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어느 날 아이들에 치여 새벽에 깼는데 이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는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 거지? 애가 셋이면서 굳이 일을 잘해보겠다고, 일하면서도 굳이 애를 셋이나 낳아 키우고 있는 나의 현실의 축소판 같은 보다 근원적인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장시간동안 뒤척이며 고민한 결론은 내가 워킹맘이어서인지, 원래 정서적으로 허기가 져서인지, 그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우리 가족은 여전히 서로에게 고프다는 것이다.


남편과 나, 그리고 아이들은 하루 종일 바쁜 일상 속에서 각자의 삶을 살기 바쁘다. 그러다 저녁에 집에서 만나면 그렇게 반갑기 그지없다. 함께하는 시간이 적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또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그럴 수도 있다. 아이들이 좀  크면 부모랑 노는 것보다는 친구들이랑 노는 것이 더 재미있고, 집에서는 조용히 쉬고 싶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매 순간이 사무치게 보고 싶고, 해가 뜨면 또다시 일터로, 학교로, 어린이집으로 어질 걸 알기에 함께 있는 시간이 매우 소중하다. 매일같이 헤어지고 또 만나는 서로를 독점할 수 있는 시간이 어쩌면 이 시간뿐임을 알기에 서로를 더 꼭 끌어안고 잔다. 조금은 당연하지만 조금은 슬프다. 그리고 서로를 그렇게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이 너무나 감사하다.


언젠가는 눈을 떠도, 며칠이 지나도, 몇 달이 지나도 서로가 그다지 그립지는 않을 날이 올 것이다. 장성하여 독립한 성인이 부모님을 며칠 못 뵈었다고 본가에 달려가는 것은 너무 이상한 것처럼 우리 집에도, 우리 아이들에도 그런 시기가 올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직은 모르지만, 그래도 오늘은, 아직은 우리는 서로가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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