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자정리’, ‘시절 인연’ 이란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이 나온다.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를 생각하며 하는 말이다.
한때 오누이인 듯 연인인 듯 지내던 수컷 고양이 (두식이, 두랑이)두 마리와 암 고양이(두리) 한 마리가 마당에서 오순도순, 알콩달콩 지내는 걸 지켜보는 게 힐링이었다. 2년을 넘게 서로를 길들이며 길고양이에서 마당고양이로 정착해 완전한 식구가 되나 했었다. 하지만 길고양이의 생은 순탄하지도 그리 간단하지도 않았다. 내 집에 오기 전부터 병에 걸렸던 두식이가 먼저 무지개다리를 건넜고, 야생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건지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지 두랑이도 집을 나갔다.
집을 나간 두랑이는 처음엔 삼일, 일주일, 열흘에 한 번쯤 들르더니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기 힘들었다. 처음엔 혹시 잘못된 건 아닐까 애가 탔고 날이 궂을 때는 걱정에 걱정을 더했다. 그러다 얼굴 잊을만하면 해질 무렵 나타나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얼굴과 다리는 상처 투성이에 뼈가 앙상할 정도로 야윈 모습에 마음 아팠지만 그렇다고 녀석을 집에 붙들어 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안타깝기만 했다. 그러던 것이 두 달도 넘게 소식이 없어 영영 못 보나, 혹시 잘못된 건 아닐까? 이제 그만 마음을 내려놔야 하나 생각하던 차에 얼마 전 녀석이 나타났다. 다행히 이번에는 행색이 말끔했다. 상처도 없고 살도 제법 올라 보기에 마음이 덜 아팠다. 사료, 닭가슴살, 츄르, 고양이 과자까지 다섯 끼는 될 정도의 엄청난 양을 먹어치운 녀석은 내게 몸을 부비며 고맙다는 성의 표시를 했다. 나는 녀석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는 말과 이렇게라도 가끔 찾아와서 얼굴 보여 달라고 애원(?)했다. 녀석은 이제 더 이상 애면글면 하지 말라는 듯 말똥말똥 쳐다보며 야옹하고 대답하더니 무심하게 길을 떠났다.
두랑이 집을 나가고 얼마 후 낯선 고양이가 드나들었다. 온통 새까만데 목과 배 부분이 하얀, 일명 턱시도 냥이였다. 두리보다 훨씬 덩치가 컸다. 사람과의 접촉이 거의 없는 듯 기척만 있어도 도망가기 바빴다. 밥이라도 배불리 먹고 가라고 아침저녁으로 밥과 물을 두 그릇씩 준비했다. 녀석의 식욕은 왕성했고 몇 달 사이에 덩치가 몰라보게 커졌다. 처음 몇 달은 두리와도 사이가 괜찮아 보여 다행이라 생각했다. 차츰 곁을 내주면 예전에 두랑이처럼 마당냥이가 될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런데 두리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밤낮으로 두리를 못살게 굴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턱시도 냥이를 그대로 두었다간 두리가 쫓겨나거나 다칠 것 같아 녀석이 보이는 족족 내쫓고 밥도 한 그릇만 두었다. 고양이 세계를 이해하기 힘들다.
혼자 있는 두리는 쓸쓸하고 처량하다. 얼마나 심심하고 외로울까 싶어 마음이 쓰였고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간식으로 달래줄 뿐이었다.
그런데
두리가 삼일 전 마당 창고 앞에 버티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어딘가를 계속 주시하며 애타게 울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두리를 지켜보던 우리 부부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컨테이너 창고 아래 구멍에서 삼사개월쯤 되어 보이는 아깽이가 살금살금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얀 몸통에 노란색과 검은색의 멋진 옷을 입은 녀석이었다. 갑자기 문을 열고 나가면 놀래서 도망갈까 봐 살그머니 다용도실 문을 열고 쳐다봤더니 어럽쇼, 두리와 아깽이가 내게로 다가왔다. 작고 가냘픈 암컷이다. 한눈에도 야위어 보여 츄르와 닭가슴살을 챙겨 들고 나왔더니 녀석은 겁도 없이 잘도 먹었다. 어디서 왔을까? (두리는 수술을 해서 임신불가!)
두 녀석이 이틀 밤을 두강이 집에 들어가 잠을 자고 낮에는 이제 막 올라오는 무의 새싹을 밟으며 텃밭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논다. 녀석은 남편과 낚시 놀이를 하고 잔디밭을 운동장 삼아 뛰어다녔다. 두 녀석이 함께 있는 걸 보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남편은 연신 아깽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아유 귀여워를 연발한다. 참 신통방통한 일은 둘째 날까지 밥그릇 하나에 사료를 줬는데 아기 고양이가 먼저 먹을 수 있도록 두리가 배려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호기심 많은 아기고양이가 온 마당을 뛰어다니고 나무 위를 오르거나 울타리 너머로 다닐 때마다 두리의 눈은 쉬지 않고 아기 고양이 뒤를 쫓으며 다칠까 신경을 썼다. 얼마나 대견하고 고마운지 모르겠다. 겉으론 안보는 척하면서도 신경 쓰고 챙겨 주는 모습니 영락없는 츤데레다. 그나저나 계속 아깽이라 부를 수도 없고 당장 이름부터 지어야겠다. 하루 종일 이름을 뭘로 할지 고민했지만 이렇다 하게 와닿지 않는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 귀여운 아기 고양이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그나저나 여기 아깽이 때문에 의문의 일패가 아니라 의문의 희생을 감수하는 반려견 두강이가 있다. 집도 뺏기고 마당도 뺏기고, 삼일째 공놀이도 못하고 있으니 영문을 모르는 두강이 녀석은 잔뜩 화가 나 있다.
가는 고양이 잡지 않고 오는 아깽이 막지 않는다.
사람의 인연도 마찬가지겠지만 끊어진 인연을 억지로 잇는다고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도 아님을 고양이를 통해 새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