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상이었다. 네온사인과 불빛들은 화려하고, 새벽 풍경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눈부시고 활기찼다.
나는 생생한 날 것의 현장 에너지에 압도되었다. 며칠 전부터 도매상가에 대해 검색을 해봤다. 도매상가주인들은 초짜들한테 물건을 팔지 않으니 초짜 티를 내면 안 된다고 했다. 딱 봐도 초짜티 팍팍 나게 생긴 나는 센 언니 컨셉으로 스모키하게 화장을 했건만 입구부터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에 기가 죽기 시작했다.
좁고 복잡한 상가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옷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좁은 길은 상인들로 꽉꽉 차서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웠다. 어깨가 부딪치고 발이 밟혀도 사과는 커녕 고개만 까닥이는 쿨한 곳이었다. 낯선 곳의 분위기를 살피느라 나는 한참을 돌아다녔다. 마음에 드는 옷가게를 발견해도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몇 차례를 돌고 나서야 마음에 드는 가게 앞에서 용기를 내어 옷 가격을 물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목소리가 작아 못들었나 싶어 다시 한번 물었다. 가게 안 여자가 살짝 쳐다보곤 이내 무시한다. 격앙된 목소리로 내가 재차 가격을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쌀쌀맞게 “소매 안 팔아요”. 상인 여자는 다시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소매 아닌데….’라는 대꾸 조차 못 하고 나는 상가 밖으로 나왔다. 첫 가게에서 보기 좋게 무시를 당하고 나니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멀리 떨어진 한적한 버스정류장 벤치에 주저앉았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건가?’, ‘계속할 수 있을까?’, ‘왜 쇼핑몰을 한다고 했을까?’ 마음이 복잡했다.
잘 다니던 광고회사를 그만두었다. 계속되는 야근에 지쳐 스트레스가 가득 찰 무렵,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을 감당할 수 없었다. 1년을 방황하며 쉬고, 시작하는 쇼핑몰사업. 첫 단계부터 난간이다.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 없으니 부딪쳐 나아가야 했다.
이 첫 계단을 오르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매일 새벽 동대문으로 향했다. 빈손으로 돌아온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도매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가게에서 첫 사입을 하게 되었다. 아기자기한 캐릭터가 그려진 라운드 티셔츠였다. 맨땅에 헤딩하듯 그렇게 쇼핑몰사업을 시작했다. 인맥도 없었다. 사입(도매로 물건구매)이라는 첫발을 내딛기까지 두렵고 외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힘으로 제법 잘 해나갔다. 나라에서 보조금도 받고 사무실도 얻었다. 주문량도 늘어 물건을 사다 주는 삼촌까지 구했다. 쌀쌀맞았던 동대문 언니들도 시간이 갈수록 친절해졌고, 신상품이 나올 때마다 샘플을 한 대봉씩 챙겨주기 시작했다.
장사한다고 말하니 친구들 반응이 모두 엇비슷했다
“네가 무슨 장사를 해?
“너랑 안 어울려.”
“너 트리플 A형이잖아?”
내가 생각해도 안 어울린다. 나라는 사람은 소심하고 약하고 겁이 많다. 뭔가를 시작할 때 늘 망설이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아보니 나는 소심하지만 대범하고, 약하지만 강인하고 겁이 많지만 부딪쳐보는 사람이기도 하다. 느리지만 꾸역꾸역 해내가는 사람이다. 쇼핑몰사업을 하면서 스튜디오를 차려 사업을 확장했다. 그렇게 확장한 사업이 실패해 빚을 지고 바닥을 쳤지만, 다시 일어났다. 어디 그뿐인가, 서른아홉 살에는 일본으로 이주하는 모험을 시작했다. 말 한마디 못했지만 잘 살았다. 두려움과 망설임에 느리게 걷더라도 한 발 한발 앞으로 가는 사람, 이게 나다.
앞으로 내가 써 내려갈 이야기는 성공적인 스토리는 아니다. 느리지만 꾸준히 걸어가는 한걸음에 의미를 담고, 두려움을 극복하는 성장기이다. 멀리 있어 보이지 않는 꿈을 따라 나아가는 여정이다. 가끔은 주위에 같이 걷는 이들과 응원을 주고받으며 내 길을 간다. 그래! 나는 뛰지 못할 뿐 계속 걸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