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현재주의자의 ‘길을 찾는 여행’ (1회)
기록은 간단없이 전개되는 사건의 연쇄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런 반응이다. 기록은 본질상 완벽한 기록이 불가능한 데서 비롯되는 비유와 상징으로써 기록자의 행위를 일정한 시적 수준으로 이끌어간다. 그런 점에서 사건의 연쇄는 시적 활동의 근거이며 동시에 그것을 기록적인 것으로 만드는 뿌리이다. 기록은 인간의 감각기능과 정신활동에 충실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윤리적이다.
기록은 모방이 아니다. 고전주의 시대의 이미타티오(imitatio)가 과거의 찬양을 통해 현재를 변화시키고자 한 의지였다면, 기록은 오늘의 눈으로 현재를 새겨 놓는 냉철한 객관성이다. 모방은 모방되는 원형을 이상화하고 그 실용적 필요에 의해 촉진된다는 점에서 효용론적 가치관을 반영한다. 하지만 기록은 모든 가치론적 시각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기록은 현재주의자의 엄정한 눈이다.
미메시스(mimesis)도 초월적 이데아나 절대 존재로서의 신을 완벽한 이상으로 여기고 그것을 모방하는 체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효용론적이다. 비록 리쾨르(Paul Ricœur, 1913-2005)가 ‘텍스트는 삶으로부터 산출되고 독자를 매개로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라며 그 개념을 보완하였지만, 독자의 능동적 ‘再형상화’에 대해 텍스트의 ‘지시’를 우선시함으로써 근본적으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eidos) 개념 안에 머물러 있다(『시간과 이야기 1•2•3』(김한식 역), 문학과지성사. 1999-2004).
현재주의적 기록은 동시대의 제반 양상에 대한 이념적 표상을 추구하지 않는다. 아무리 강한 표상화의 욕구를 가졌더라도 인간은 통시-공시적 제약 속에서 실재적 한계에 봉착한다. 때문에 현재주의자는 현실 맥락 속에 주어진 사실을 객관화시키는 데 매진할 수밖에 없다. 이념이 아니라 실상을, 진실이 아니라 사실을 앞세우는 속에서 현재주의의 참다운 본모습이 드러난다.
기록은 모사(模寫)가 아니다. 사물을 원형 그대로 옮겨 담고자 하는 의욕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모사 결과물은 원형의 단순 반복에 가깝다. 오히려 주목되는 것은 반복을 가능케 하는 모사 능력이다. 결코 원형과 동일할 수 없는 모사 결과물의 운명에 절대적 영향을 주는 것이 원형의 세부에 육박해 들어가는 모사자의 기능이라는 점에서 모사는 기능주의적이다. 모사는 그 효용에도 불구하고 단지 몰가치적일 뿐이다.
기록은 개별 기록자의 선택과 그것에 따라 드러나는 특정한 관점을 부정하지 않으며, 동시대 기록자의 기록 태도와의 정향성(定向性)을 부인하지 않는다. 의도하거나 계획하지 않지만 선택적 기록은 결과적으로 기록 결과물에 특정한 관점을 부여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온전한 내 생각도 다른 사람과 사회, 역사로부터 영향을 받아 생성된 ‘공유된 기억과 경험’에서 비롯된다.”며 기록물의 공공성에 주목한 아키비스트(archivist) 안정희의 언급은 타당하다(『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 이야기나무, 2015).
기록은 또한 복제(複製)가 아니다. 사물의 기계적 모사를 복제라고 할 때 현재주의적 기록은 근본적으로 복제일 수 없다. 등사기나 복사기, 사진기, 복제용 소프트웨어 등을 사용해 완벽에 가깝게 원본을 재생산하는 복제는 ‘아우라(Aura)’를 상쇄시켜 원작의 유일무이한 현존성을 위축시킨다는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지적과는 별개로 대단히 실용적인 필요성과 가능성을 갖고 있다(「技術複製時代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심성완 역), 민음사, 1983). 그러나 현재주의자는 일체의 변형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변형을 무조건 긍정하지도 않는다.
기록은 기록 대상에 대한 선택을 필요로 한다. “관습과 규칙을 가진 역사적 제도로서의 문학”의 양식적 압력을 언급하면서도 이러한 “규칙을 어기고 이를 몰아냄으로써 차이점을 도입하고 발명하고 더 나아가 의문시하는 제도”가 문학이라는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주장은 기록의 본성에도 부합한다(「문학이라 불리는 이상한 제도」, 『문학의 행위』(정승훈•진주영 역), 문학과지성사, 2013). 그런 점에서 기록은 동시대인의 정향성과 유기적으로 소통하면서도 기록자 개인의 고유한 가치와 의도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현재주의적 기록은 창조적이다. 물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기록 대상이 선재(先在)한다는 점에서 기록자는 수동적이지만, 주어진 대상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능동적이다. 기록자의 창조성은 대상을 기록하는 방법과 기록 결과물의 특성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창조성은 기록자의 선택과 기록 방법과 결과 모두에 귀속되는 것이다.
기록은 ‘A 또는 B’라는 배제의 논리도 아니고, ‘만일 A라면 B’라는 수동적 논리도 아니다. 기록은 생산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은 논리적 배제나 수동적 선택을 넘어 생성되는 모든 것을 긍정하는 ‘생산의 생산’에 가깝다. 그것은 절대적 긍정을 지향한다. 그것은 생산의 동력으로서 욕망을 규정하는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와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의 연결적 종합(connective synthesis)에 해당한다(『앙띠 오이디푸스』(최명관 역), 민음사, 1997). 참다운 기록은 생산적이다.
시인에게 시는 우이(偶爾)다. 한 순간의 돌발적인 자극에 대하여 시적 기록자는 감각적•정서적으로 반응한다. 그 결과물은 짧은 한 가닥 시구일 수도 있고, 한 줄의 시행이 될 수도 있고, 한 편의 장시가 될 수도 있다. “한 여인의 첫인상이 한 사내의 생을 낙인찍었다”(김중식, 「아직도 신파적인 일들이」)는 시행이 ‘첫인상’과 ‘낙인’의 생경한 조응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면, 일상의 누구에게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첫인상’에 그쳤을 것이다.
돌발적 자극에 대한 시인의 반응은 근본적으로 언어적 결과물로 나타난다. 시인은 한 여인의 ‘첫인상’을 선택했고, ‘낙인찍었다’고 기록했다. 다른 모든 정서적 반응과 마찬가지로 시는 모국어의 언어적 형식과 굴레를 거쳐 특정한 시 양식으로 수렴된다. 시인은 기록하는 인간, 현재주의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