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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간호사 Feb 06. 2023

코로나19 파견, 인정받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파견직 모두가 의료진으로서의 사명감이 1순위는 아니었다. -1



"... 아, 다음 달 6일에 OT(*Orientation, 오리엔테이션)가 있다고요?"

당장 다음 주네요-. 그 안에 파견하면서 살 집도 구해야 할 텐데-


파견이 매칭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당장 다음 달 초에 OT가 있으니 반드시 참석하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막막하지만, 매칭이 귀했던 당시인 지라-.

".. 네, 알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문자로 따로 보내주시나요?"

자신을 내 보기로 한다.



3차 병원을 사직을 한지는 약 반년 정도 지났다. 울며 뛰쳐 도망치듯 나온 내 첫 직장, 수도권이 싫어서 도망치듯 내려온 지방에서 나는 급하게 올라갈 준비를 해본다.






사직 후 반 년동안 이것저것 해봤다.




처음에는 해외에서 간호사를 하겠다고-. 우리나라 간호사로서의 근무 환경은 너무 삭막해서, 내가 더 똑똑한 간호사가 되어도 커가는 느낌조차, 인정조차 받기가 힘든 환경이라서. 간호사 1인이 보는 환자수는 거의 반의 반의 반 수준이지만 월급은 2-3배로 받을 수 있는, 해외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외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기도 하고, 접수를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밖을 쏘다녔다.


그리고 7년간 썩혀있던 운전 면허증을, 장롱 문을 열어 꺼내 들었다. 그리고 운전하는 방법을 1부터 100까지 까먹어 버려서, 어머니의 12년 된 차를 빌려 운전 연수를 받았다. 그렇게 사직한 지 첫 두 달을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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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한 지 약 3개월 정도 되었을 때에는, 아는 동생의 소개로 서울의 유치원들 6-7군데를 돌아다니며 코로나19 긴급 대응 인력, 결국 코로나19 증상이 있는 아이들을 케어하고 코로나19로 부터 예방하기 위한 환경 관리 및 예방 교육 같은 걸 하는 보건교사 비스름한 일도 했다. 덕분에 서울에 살고 있는 친언니 집에 머무르며 서울의 삶도 아주 잠-깐 즐겨봤다.

그리고 상근으로 일하니 하루가 덜 피곤해서- 아니, 사실 코로나19가 국내에서 퍼져 나간 지도 벌써 반년 조금 안되게 지나온 상태인지라 이미 대다수의 유치원에선 환경이 어느 정도 구축된 상태였다. 그래서, 교육을 준비해서 6-7군데에서 돌리면 되었고 이후엔 아이들이 마스크를 잘 쓰는지, 손은 잘 씻는지- 봐주면 되었다. 결국 아이들과 놀아주는 게 거의 주 업무가 되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을 화려하게 화장을 하고 가운을 입고 있는 나를 그저 선망의 대상처럼 따르고 좋아해 주었다. 아이들의 부모님들 또한 유치원에 없던 의사가운을 입은 사람이 '간호사'라며 나타나니 그저 믿어 주셨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내겐, 근무 환경은 행복한 곳 자체였고 왜인지 아이들 덕에, 병원에선 잘 느낄 수 없는 간호사로서 자존감과 자부심이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이 직장의 업무 강도이전 병원에서 일하던 것의 1프로 정도밖에 안 는 느낌이었다. 근무를 끝내고 집에 가도 피곤하지가 않고 쌩쌩해서- 이것저것 못해봤던 공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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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살이라도 어릴 때, 수도권을 벗어나 보고 싶었다.


대한민국 사람은 서울로 가야 한다고-.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서울. 그 서울의 삶이,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거려 봤다.



'그놈의 인프라(*)..'

*infrastructure, 생활이나 생산에 있어서 살아가는 데에 기반이 어떤 지. 즉 살아가는 데에나 앞으로의 발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쓰는 말.


그, 그놈의 인프라를 무시하고 난 어딜 가나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운전 연수가 끝나고 간간이 차를 몰아본 지도 3개월, 어머니의 소향 세단에 무턱대고 내 생활에 필요한 모든 짐들을 욱여넣고 '초보 운전' 딱지를 붙인 채 380km를 달려 지방으로 향했다.


사실, 겁이 많아서- 깡촌까지 가기엔 약간 두려워서, 여행 다니며 알게 되어 몇 년 동안 연락을 유지해 왔던 사람들도 꽤 많고, '제2의 수도지-!' 싶었던 그곳.

부산광역시로 향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부산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뭐, 부산 사람들은 정말 하나같이 다 정이 넘쳤다.

'누가 경상도 사람들이 무뚝뚝하대-?' 싶을 정도로, 부산에 있는 친구들이며 동생들, 언니 오빠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내가 부산에서, 자신들의 고향에서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란 듯 발 벗고 나서서 어디서 살고 어디서 일하면 좋을지 이야기해 주었다.



그중 간호사를 하고 있던 동생은 내 일인 마냥 걱정해 주고 고민해 주었다.


"뭘 그렇게 까지 해-. 어차피 간호사인데, 어디든 취업하겠지-!"

근거 없는 자신감. 근자감으로 똘똘 뭉쳐 나는 큰소리쳤다.

"... 언니, 생각보다 부산이 갈 곳이 없어요.."



평상시 근무지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특히나 "이런 근무 환경에서 환자가 좋아질 수가 있겠냐-?"며 환자가 좋아지기 위함은 의료진의 근무 환경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던 나였기에 더 그랬던 모양이다.


아차.. 이 동생을 처음에 다른 지역에서 만났을 때,

태움과 근무 환경, 삼 교대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었다.


동생은 당시 컵을 왕창 갖다 놓고 모든 사람의 물을 따라주며 '저 물 잘 따르죠? 병원에서 맨날 하던 거라-' 하며 머쓱하게 '헤헤'하며 웃었던 게, 그리고 '나오데(*)를 자주 해서 정말 피곤 해.' 하며 징징대던 내게 '나오데 힘들죠. 암요. 저는 듀티를 더블로 뛰어봐서..' 라길래 더블이 내가 아는 다른 단어가 있냐고-.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간호사 듀티는 데이(오전 근무), 이브닝(오후 근무), 나이트(밤 근무), off(휴무일) 이렇게 나뉜다. 나오데라 하면 3일 동안 나이트-off-이브닝 근무를 했다는 뜻이다. 나이트 끝난 다음날 off는 결국 off날 아침에 퇴근해 집에 와 씻고 자고 일어나 보면 늦은 오후가 되어있다. 결국, 내 하루를 하루답게 쓰지 못한다. 하지만 다음날 근무가 있으면 또 그날 밤엔 다음날 근무를 위해 취침 시간을 금세 바꿔주어야 한다. 최근 들어 나이트 후에 off를 무조건 이틀 이상 주는 병원이 많아지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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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거 잊었나- 나, 실업자들을 위한 회사에 있다는 거."

그리고 부산에서 가장 친한 친구는 생각해 보니, 실업자들을 재취업시키기 위해 일하고 있었다. 그만큼 부산에 일할 곳이 없다며-. 간호사들은 잘 안 오긴 하지만, 적어도 그들도 업무 환경이 수도권에 비하면 일할 만한 환경이 더 못 된다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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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달간 부산에서 나는 불면증만 심해졌었다.

내가 패기 넘치게, 행복할 목적으로 내려왔는데 여기서 취업을 했다가는 쓴 맛을 보고 애정의 도시가 애'증'의 도시가 될까 봐. 8개의 구직 사이트를 켜놓고 눈이 시뻘게지도록 들여다보았지만, 갈 곳은 없었다. 심지어 요양 병원마저 업무양으로 지쳐 쓰러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괜히 손톱만 잘근거리며 물어뜯었다.



'.... 도, 도대체 광역시인 부산이 이 정도면, 다른 지방은 어떻다는 거야..'

거의 눈물을 머금고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내던 동생이 코로나19 파견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대구와 경북에서 신천지로 인해 코로나19가 확산되고, 파견 간호사들이 언론에 올라올 때마다 멋있지만, 내가 필요로 쓰이는 사람이 될까 싶어 머뭇거리던 그 파견 간호사, 결국 난 신청서를 작성했다.







급하게 부산에서 올라와 하루가 멀다 하고 방을 알아봤다.

어머니와 친언니는 자취를 한 번도 안 해본 내가 혼자 방을 알아보는 게 걱정이 되어서 따라와 주셨다. 그렇게 하루 만에 집을 알아보고 다음 날 찾아가 집 상태를 확인하고 바로 집을 계약하고, 오리엔테이션 전 날 짐을 싣고 짐을 풀었다. 일주일 동안 벌어진 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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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테이션에서는 코로나19 환자를 보기에 앞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 교육, PAPR(*) 및 Level D 방호복(*) 탈착의 방법, N95 마스크를 올바르게 착용하는 방법,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로나19 중환자실에서 쓰이는 각종 기계들(Ventilator(*), CRRT(*) 등)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교육했다.

*PAPR: Powered Air-Purifying Respirator , 허리에 기계를 차게 되고 후드를 착용한다. 기계에 들어있는 필터를 통해 외부 공기가 정화되어 호스를 통해 후드 안으로 정화된 공기를 제공해 주는 기계.

*Level D 방호복



*Ventilator: 인공호흡기

*CRRT: Continuous Renal Replacement Therapy, 지속적 신대체요법으로 급성신부전의 환자에게 투석을 적용할 때 흔히 사용한다.

관련자료)

CRRT [Continuous Renal Re..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투석(dialysis) : 지속적 신대체요법의..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사실, 출석해 있던 파견 매칭에 성공한 간호사들 대다수가 중환자실 경력자였기에 대다수가 이해하는 데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 또한 이전까지 일했던 병원에서 많은 회사의 기계들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근무는 일단, 일주일치만 드리고요. 그전에 이번 달 근무는 무조건 드릴 테니 너무 걱정 마시고.."

오리엔테이션이 끝날 때쯤 파견 병원 중환자실 부서장님이 이야기하셨다. 그래, 어찌 되었든 난 당장 다음날 근무 스케줄로 나이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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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근처 마트에 가셔서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사다 놔주셨다.

"청소기가 따로 없는 데, 이거 빗자루가 좀 좋을 것 같아서.. 이건 접시들. 국자는 작은 걸로 샀어."


어머니는 하루 밤을 나와 함께 해 주셨다.


다음 날이 되어 첫 근무, 나이트 근무를 위해 밤에 나가려는 데 어머니가 나를 보며 글썽거리셨다.

".. 딸, 지금 가는 거야? 오늘부터 당장 일하는 거야? 코로나 환자들 돌보는 거야..?"



"에이- 엄마 왜 그래. 내가 뭐 어디 팔려 가-아?"

어머니는 쪼르르 달려와 나를 꼭 끌어안아주셨다.

"조심하고.. 알았지?"








나이트 근무를 수행했다. 파견병원 대다수가 팀 간호(*)가 아닌 펑셔널(*)로 하고 있었다. 내 환자가 정해져 있는 시스템이 아닌, 본원 선생님들이 차팅, 즉 전산을 만지고 파견 간호사들이 액팅을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신규 간호사 때 어떻게 보면 가장 이해하고 적응하기 어려웠던 전산을 배울 필요가 딱히 없었기 때문에 파견지에서 적응기간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팀 간호: 팀 간호란 A팀, B팀 등으로 나누어 내 담당 환자(마이 페이션트, My patient)를 정해놓고 간호를 한다. 그럴 경우 내 환자에게 제공하는 간호 활동(액팅)과 전산처리작업(차팅) 모두 담당 간호사가 시행한다. 담당 간호사가 액팅을 하고 자신이 시행한 액팅에 대하여 전산 처리까지 담당 간호사가 시행하기 때문에 내 담당 환자를 좀 더 꼼꼼히 체크할 수 있어 좀 더 나은 질의 간호를 제공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많은 3차 병원에서 병동 간호사의 경우 자신의 담당 환자는 12-24명 정도 되며, 중환자실 간호사의 경우 자신의 담당 환자는 1-4명 정도 된다.

*펑셔널 간호: 펑셔널 간호의 경우 차팅을 넣는 간호사, 액팅을 하는 간호사가 따로 있다. 인력이 부족할 때 자주 쓰는 방법이다. 유닛(unit, 부서)에 간호사 2명이라는 적은 수의 인력으로 많은 환자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보통 윗년차의 간호사(선배 간호사)가 오더 처리 및 전산 처리를 보통 시행하며, 아랫년차 간호사

(후배 간호사)에게 간호 활동, 즉 액팅을 시행하게끔 지시한다. 펑셔널 간호를 시행할 경우 저 연차에 많은 간호 활동, 액팅을 시행해 보면서 간호사로서 스킬을 많이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은 있으나 자신의 담당 환자가 아니기 때문에 좋은 질의 간호를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파견 간호사는 8시간 내내 PAPR에 Level D 방호복을 착용하고 있기에는 화장실을 갈 때마다 탈착의 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착용하고 있는 동안에는 통풍이 되지 않아 땀을 많이 흘리면 탈수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약 2-3시간씩 일하며 교대하는 구조였다.


즉, 2시간 정도를 일하면 2시간 동안 환자 모니터를 체크해 준다던지, 밖에서 해야 하는 활동들에 도움을 준다던지, 휴식을 취한다던지 등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해서, 사실 이전 3차 병원에서 일할 때보다 내 담당 환자가 없어 부담이 없었고 업무 강도자체도 덜 힘들었다.




"선생님은 어디서 오셨어요?" 연차가 많아 보이는 선생님들 두 분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 저는 경기도 남부에서 왔어요. 선생님들은요?"

"저희도 수원, 동탄에서 왔어요."

"꽤 가까운 곳에 계시네요. 파견 기간 동안은 잠시 여기서 자취하시는 거예요?"

"음, 그렇긴 한데.."

".. 저희는 이번주까지만 하고 이제 그만하려고요."

두 선생님께서 연속으로 답했다.

"아.. 왜요?"

"저희는 중환자실 출신이 아니기도 하고 쉰 기간이 좀 많았는데, 중환자실로 파견 왔더니 눈치가 많이 보이더라고요."

두 선생님들은 간호사가 되신 지 15년 정도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큰 병원 병동에서 일하시다가 아이를 낳고 상근직에서 쉬고 계시다가 파견을 신청하게 되었는데 얼떨결에 중환자실로 배치되었다고 한다.


"텃세 같은 게 있는 거예요?"

"뭐 잘 모르거나 하면 가르쳐주면 되는데, 그냥 그것도 모르냐는 식이고.. 그래서, 눈치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저희 발로 나가려고요. 더러워서."

두 선생님들은 파견하는 동안, 즉, 코로나19 중환자실에 파견하면서 많은 것들에 시달려 쌓인 것이 많아 보였다.

"... 같이 돕자고 하는 건데 그런 일도 있군요.. 아쉽네요.. 같이 일하면 좋았을 텐데.."

선생님들은 씁쓸하게 허허- 웃으시며 '그러게요.'라고 하셨다.



"애초에 경력 부서로 배치해 주면 그게 가장 베스트일 텐데.. 그렇게 파견 배치가 이루어지는 건 아닌가 보네요. 인력이 낭비되는 느낌이네요.."









나이트 근무를 3일 연속으로 하고 하루 쉬고 이브닝으로 출근해야 하는 날이다. '쓰나', 그리고 '나오이'. 쓰리 나이트와 나이트 오프 이브닝. 사실 이전 3차 병원을 다녔을 당시 '쓰나'는 물론이고 신규 때에는 '포나', 그러니까 연속 나이트를 4일까지 해봤고, '나오이'를 밥먹듯이 시행했던 지라 내게 쓰나 후 나오이 근무는 그렇게 힘든 근무는 아니었지만, 나이가 먹을수록 힘든 건 사실이긴 했다. 게다가 최근 들어 나이트를 3개 이상 주지 말라는 말도, 나이트 후에 오프를 2개 이상 지급해야 한다는 말도 많이 나오고 있던 지라 국내 큰 병원에서는 사라지는 추세이긴 했다. 하지만, 내가 현재 파견 온 병원은 작은 2차 병원, 종합 병원정도일 뿐이니까-.


"하-아" 하품을 크게 했다. 현재 시간 오후 1시 반, 나이트 근무를 3일 연속으로 하고 어제 아침에 퇴근해 오늘 낮까지 누워만 있었음에도 피곤이 가시지 않는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 점심 밥상을 대충 차렸다. 어머니가 며칠 전에 반찬을 왕창 갖다 놔주셔서 끼니를 거르지 않고 챙겨 먹을 수 있었다.



좋아하는 예능 클립영상을 보며 점심 끼니를 대충 때웠다. 슬슬 나갈 준비를 했다.

'어차피 PAPR 입으니까..' 화장을 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화장을 하고 방호복을 입었다 땀이라도 냅다 흘려버리면 그저 찝찝하기만 할 테고, 너무 얼굴에 신경 쓰는 사람 같아 보이니까 애초부터 화장을 하지 않기로 했다.



얼굴에 톤업(*tone-up, 하얗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는 선크림을 대충 벅벅 발랐다.



"으-! 추워!"

10월인데, 벌써 얇은 바지 사이로 들어오는 가을바람에 추위를 느끼며 출근했다.








"선생님, 오늘 끝나고 족발 드시러 가실래요?" 덩치 큰 남자선생님이 와서 이야기했다.

"오 회식이에요?" 회식은 또 빼놓을 수가 없지. 새로 와서 선생님들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다.

"뭐, 거창하게 부르자면?"


선생님은 머리를 긁적이며 이야기했다.


'좋아요-.' 대답하고 근무를 마쳤다.


나오는 길에 저번에 말을 섞었던 연차 높은 선생님들 중 한 분이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모니터링 기간 2주 채우고, 그때 방 뺄 거야."

다른 선생님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파견으로 온 인력들에게 파견 기간이 끝나고 2주간의 모니터링 기간을 신청할 수 있다. 그러면 일당 일정 모니터링 비용을 지급해 주었다.

"저희 모니터링 기간, 무조건 격리해야 하는 거예요? 보니까 자가 모니터링 기간 느낌이던데-."

"맞아요. 그냥 셀프로 코로나19 증상 있는지만 살피면 되긴 해요. 그래서 밖에 돌아다녀도 괜찮아요. 근데 저 선생님은 성격이 워낙 완벽주의이가봐요. 가족들한테 민폐 될 행동은 하나도 하지 않으시겠대요."

"와- 대단하시네요."


자가 모니터링 기간, 그냥 증상만 있으면 되는지 살피는 2주간의 기간일 뿐이어서. 그 2주간은 다른 곳으로 파견신청을 하지 못하지만 일당이 나오기 때문에 그냥 일도 안 하고 돈을 받는 셈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2주간 정말 격리기간을 갖고 그때서야 방을 빼겠다고 하신다. 한 달짜리 방을 굳이 한 번 더 연장하신 것이었다. 격리는 집에서 해도 되는데, 가족들을 위해서 방을 빼지 않는 모습에 '대단하시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

.


우리는 족발집에 쪼르르 앉았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오늘 이브닝으로 근무한 선생님들의 90%가 전부 병동경력이었다.


"아- 진짜, 오늘 유린(*urine, 소변) 카운트랑 소변통 비우는 거 내가 하려고 했는데 이 선생님이 다 해가지고 내가 할 게 없었잖아-!"

그중 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병동출신 선생님들이라며 기계에서 알람이 울리면 어떻게 대처하는지 방법을 몰라 무조건 중환자실 출신 선생님들이 다뤄줘야 한다고- 그래서 우리는 루틴업무, 끽해봐야 바이탈, 잡 업무에 특화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셨다.




뭔지 제대로 겪어본 적이 없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허허 웃었다.

"아 근데 어제 그 김수진 선생님, 무서워 죽겠어. 표정으로 나한테 욕한다니까?"

"맞아요. 진짜.. 태움이 따로 없어요. 병동출신인 거 서러워서 진짜. 나보다 실질적으로 연차도 낮은데, 중환자실 출신이라고 나를 완전 신규 취급한다니까?"

"선생님은 중환자실 경력이라 하셨죠? 선생님은 그러시면 안돼요-!"


나는 중환자실 출신이긴 한데-. 물론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건 잘못된 일이지만.

나도 겪을 수 있는 문제들인 걸까-?



'그 선생님이 뭐 어떻길래 그러세요-.', '아, 진짜요?', '아이고, 상처 많이 받으셨구나.', '서운하실 수도 있겠네요.', '그런 일들도 있었구나.'

나는 적당히 받아쳤다. 보지도 못한 사람을 욕할 수는 없어서, 아직 어떤 선생님들 인지도 모르는데 괜히 격하게 반응했다가 나만 이상해질 수도 있으니까-




사실 잘 모르겠다.

다들 파견 온 지 6주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아직 기계 다루는 법을 배우 지를 못하셨구나. 같이 알고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그럼 듀티마다 중환자실 출신 선생님들이 한 명씩은 무조건 있어야 되는 건가?

뭐, 그래도 성격은 다들 좋아 보이셔서 다행이야.

생각했다.


그래도 파견 매칭 자체가 행운이니까, 자신이 고급인력으로 다뤄지지 않아도 버티려는 마음이겠지?

매칭부터 환자에게 최선인 방향으로 굴러갔으면 좋았을 텐데.



어쨌든, 난 적응이나 하자.

씁쓸하게 웃으며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안녕하세요. 오늘의 간호사입니다.

요즘 공부를 한다고 업로드가 상당히 늦네요..


파견을 다니다 보니 알게 된 것은, 자신의 경력과 무관하게 부서가 배치되기 때문에 사실 1부터 배우며 새로 적응해야 하는 것이나 다름없던 경우가 많았죠.


저도 만약 수술실 같은 생소한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면 정말 막막했을 것 같아요.

당시 일하면서 느낀 건 오래간 경력이 단절되었던 인력들은 생활치료센터 등에서 일하고, 병동출신 인력은 병동에서, 중환자실출신 인력은 중환자실에서 일하면 교육이랍시고 버려지는 시간들이 덜했을 거라 생각하곤 했어요.


물론 국가에서 배치하는 데에 경력까지 고려해 가며 배치하기엔 복잡해질 듯하여 선착순의 느낌으로 인력이 배치되는 것이었을 겁니다.


병동 경력 선생님들은 아무래도 경증 환자 다수를 보는 것이다 보니 중환자실에서 중증의 환자 소수를 obsessive(*)하게 보는 데에 적응하기도 힘들고, 중환자실에서는 새로 보는 기계가 많아 수년의 경력이 있으심에도 교육이나 OT기간이랍시며 버려지는 시간들이 많았습니다.

반대로 중환자실 간호사들이 병동으로 배치되면 다수를 보는 게 익숙지 않아 쓸데없이 obsessive 해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았고요.

이런 식으로 인력이 제대로 쓰이지 못해 서로 일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어려워 감정이 상하는 경우가 은근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경력만 10년이 넘는데, 여기서 나보다 어린애들한테 무시당해야 해?내가 모르니까 아는 사람이 하면 되는거 잖아.', '저 선생님은 왜 환자를 저렇게밖에 못 보지? 왜 알람에 저렇게 무딜 수 있지? 능력치가 다른 데 같은 돈을 받으며 일하는 건 불합리한 일이야.'처럼 말이죠.

*obsessive: 강박적인,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병원에서 꼼꼼하게 환자를 살필 때 '옵세'하게 환자를 본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즉, 병원 인력들이 '옵세'를 '과하게 꼼꼼하게'라는 느낌으로 은어처럼 사용한다.


하지만 의료진으로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이 과연 환자를 위한 일일까 고민해 볼 수 있는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해서 오늘 이야기는 은근슬쩍 사직한 간호사의 이야기와 지방에서의 업무 환경을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수많은 파견 병원에서 있었을 법한 이야기를 가벼운 프롤로그 느낌의 글로 풀어 보았습니다.

좀 더 상세하고 감정이 들어간 이야기는 이후 본격적으로 풀어보겠습니다 :)



오늘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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