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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Jan 13. 2023

여우고개

갈 길 잃은 사람들



어제와 그제가 다르지 않았던 것처럼, 기름때로 얼룩진 버스 차고지에는 갈 곳 는 사람들이 갈 길 잃은 눈빛으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어단어장을 들고 서 있던 20년 전에 나도 그들 사이 어디쯤 그들처럼 어른이 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것 같다.


나는 커서 이렇게 많이 변했는데, 노력해서 어른이 되었는데, 부천역은 그때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다. 저 역사 밑 지하상가에 내려가 보아도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어제 지났었던 것처럼 그 땅속 아래 번잡함이 그대로 상상되었다.


버스 차고지에서 방향을 틀어 동쪽으로 향하자 익숙한 버스 정거장들이 하나씩, 또 하나씩 나타났다. 저 정거장들마다 비슷한 표정의 사람들이 타고 내렸었다. 20년 만에 찾아온 나를 반겨주는지- 익숙한 상가들이, 또 이따금씩은 낯선 건물들이 고개를 따라 도열해 있었다.


어른이 되기 전에는 그 크고 건장했던 건물들이 이제는 아빠처럼 작고 왜소해져 있었다. 또 그 길고 지루했던 고개는 생각보다 짧아 너무 추억에 잠기려는 내게 많은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어느덧 고개의 마루였다.  

 

여우고개의 마루를 지나자 행정구역이 바뀐다는 표지판이 서있었다. 이쪽에선 안녕히 가시라고, 저쪽에선 환영한다고- 말이다. 수험생 생활을 하면서 수 백번을 넘었을 그 고개의 마루는 행정구역이 바뀌는 곳이기도 했지만 내 마음이 바뀌는 감정행정구역이기도 했다.


고개 이편은 마음이 차려지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다짐이 섰던 곳이었고, 고개 저편은 이쯤 되면 집에 다 왔다-라는 생각에 단어장을 덮었던 구분이 있었다. 낡고 허름한 빌라였지만 래도 '이젠 집에 왔다'라는 안도감에 승모근에 신경들이 하나 둘 여유를 갖게 되었었다.


여우고개를 내려가는 길엔 건물이 없다. 산등성이를 구불구불 기어 내려간다. 버스 기사님들은 나를 5분이라도 빨리 집에 데려다 주려했었던지 엑셀에서 발을 떼지 않으셨다. 집에 다 왔다. 집에 다 왔다. 사거리에 도착했다.


이제 와서 사방을 돌아보니 별것 아닌 작은 동네였다. 그땐 내 세상에 전부였는데. 이젠 차로 잠깐이면 지나갈 한 뼘 남짓한 동네였다. 걸어선 한 시간이었는데. 이젠 작아진 건물처럼, 작아진 아빠처럼, 작아진 그때 나처럼 한 뼘이었다.


어린 시절 크다고 느꼈던 것들이- 어렵다고 느꼈던 것들이- 멀다고 느꼈던 것들이- 어른이 되어보니 여우고개처럼 작아져 있었다. 내 시야는 소총의 유효사거리만큼이었는데, 이제는 여우고개 동쪽에 어떤 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어떤 역이 있고, 남쪽으로는 어떤 고속도로가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북쪽으로는 휴전선까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가 눈에 훤하다.


배우고 익히고 경험할수록 내 전부였던 세상은 작아졌다. 여우고개만큼 작아진 짧아진 내 예전 세상을 보며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가, 이내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물고 있는 것 같은 허무함이 들었다.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이, 차고지에 갈 길 잃은 사람들과 같은 '어른'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해지고  커지고 시야가 넓어진 게 아니라, 덤덤해지고 남을 얕보고 작은 것에 집중하지 못하는 '바쁘고 피곤하고 거만한 어른'이 된 것은 아닐까. 반짝거리는 학생들이 보면 '갈 길 잃은' 한 사람이 되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남들 뒤에 줄을 서있는 그런 사람이지는 않을까.


20년 만에 여우고개를 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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