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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rot Jun 29. 2020

아가씨, 결혼은 했어?

할머니가 말하는 결혼을 해야하는 이유

퇴근하고 집에 가려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데 샛노란 꽃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실 무슨 꽃인지도 잘 모르는데 그냥 오랜만에 우연히 스친 꽃이 어여뻐서 길을 걷다 멈춰 서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평소라면 피곤해서 주변을 둘러보기는커녕 정신없이 집에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기 바빴을 텐데 그날따라 눈에 들어왔다.







집으로 갈 버스를 타야 해서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후, 타야 할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양옆에 할머니 한 분과 여대생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앉아계셨고, 다른 좌석에 20대로 보이는 남성분이 계셨다. 할머니와 여대생 둘 사이의 자리는 생각보다 좁은 공간이었지만 버스를 타려면 10분을 기다려야 해서 자리에 앉는 것을 택했다.


그런데 옆에 앉으신 할머니께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었나 보다. 마스크를 써서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할머니가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 있는 그 누구도 할머니의 말에 대답해주지도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나는 바로 옆자리라서 할머니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고자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할머니께 나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시겠냐며 눈빛을 보냈다.


할머니께선 그 눈빛을 알아차리곤 곧장 나에게 질문을 퍼부으셨다.


아가씨, 학생이야?
그럼 나이는 얼마나 먹었수?



아니에요, 직장 다니고 있어요. 했더니 나이는 몇이냐고 하셨다. 그래서 올해 스물여덟이라고 대답했더니 할머니께서 결혼은 했냐고 물으셨다.


그럼 결혼은 했어?




그래서 결혼은 아직 생각이 없다고 대답하니 남자 친구는 있느냐며 질문에 꼬리를 다셨다. 그래서 그것도 없어요, 했더니 빨리 남자 만나서 결혼하라고 하셨다.


여자는 빨리 결혼해야 돼. 지금도 나이가 많아~

스물여덟이면 아직 어린 나이 아니에요? 했더니 아니라며 왜 그렇게 많이도 먹었냐며 한껏 진지한 얼굴을 하셨다.









어른의 말씀이라서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셨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정말 달라도 너무 다르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다를 수밖에 없는 게 할머니는 일찍 결혼을 해야 하는 삶을 살아오셨기 때문에 내 또래의 젊은이들의 삶을 이해하긴 힘드실 거라고 생각했다. 할머니께선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라고 하셨고, 남자 얼굴은 보지 말라는 조언도 해주셨다. 어르신들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뻔한 이야기였지만, 그 뻔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내가 어디 가서 결혼에 관한 어느 60대 할머니의 생각을 들을 수 있겠는가 싶었다.


할머니는 결혼을 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나중에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배우자도 없고 자식도 없어 외롭다고 하셨다. 본인이 아플 때 물 한잔 떠다 줄 사람이 없어 외롭고 슬프다며 결혼은 꼭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야 늙어도 주변에 사람이 있다며.


할머니에게 배우자도 없고 자식도 없는 것일까 생각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할머니는 본인의 결혼에 대한 생각들을 이야기하신 후에 여느 어른들이 그렇듯 자식 자랑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우자 분에 대한 자랑은 일절 하지 않으셨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내가 그분의 삶을 다 이해할 순 없지만 요즘 같은 결혼을 원하지 않는 비혼 주의의 사람들이 많은 때에 만약 결혼을 하지 않아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자신이 외로워진다면 어떻게 해야 덜 외로울까를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일까라는 고민도 진지하게 해 볼 수 있었다.


할머니는 버스가 다 와 갈 때쯤 내게 본인 자식이 하는 장어집 주소라며 자식분의 명함을 주셨다. 담양에 오면 꼭 들러 내 이야기를 해서 서비스도 먹으라며 손도 잡아주셨다. (이 모든 게 할머니의 마케팅 큰 그림은 아니었을 거라 믿는다..) 담양에 가게 되면 이 곳을 꼭 찾아가 할머니를 다시 만나든 자식분을 뵙든 인사라도 꼭 드리고 싶다.


아쉽게도 할머니보다 내가 먼저 버스를 타게 돼서 인사드리고 버스에 오르는데 할머니가 조심히 가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며 손을 흔드시는데 어찌 그리도 소녀 같으실까 싶었다. 그 모습이 꼭 그날 퇴근길에 봤던 꽃을 생각나게 했다. 할머니도 분명 그 꽃처럼 어여뻤던 시절이 있으셨겠지. 하지만 버스에 올라 할머니를 다시 생각해보니 할머니는 여전히 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나와 신나게 이야기를 나눈 그 시간은 소탈하고 소녀 같은 분이었으니.







다음에 다시 그 정류장에서 보게 되면  할머니께서 인사하자 하고 말씀하셨듯이, 다음에 다시 만날 기회를 얻는다면 반갑게 인사드려야겠다.


같이 이야기 나눠서 그날 너무 즐거웠어요, 할머니!

다음엔 자식 자랑 말고,

할머니 본인의 이야기도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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